고레에다 히로카즈 '걸어도 걸어도'를 들으며
일본 영화를 안 본지 꽤 오래 되었다. 영화 자체를 자주 보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라기 보다 맘에 드는 영화를 고르는 데 너무 힘을 빼다 보니), 근래에는 특히나 일본 영화에 손이 잘 가질 않는다. 요 몇년 사이 본 영화를 떠올려 봐도 안경 이나 심야식당 정도가 생각나는 전부다. (이 두 영화는 정말 좋아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언제부터 인가 일본 영화가 주는 상투적인 느낌이 좀 거슬렸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누렇게 뜬 색감과 다다미 방과 과장된 말투가 진부하게 느껴졌나 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역시 이 세 가지를 다 갖추고 있다. 그래도 히로카즈 감독에 대한 예찬을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게 있어서, 그의 영화를 몇 번 보려고 도전 했었는데 다 실패했다. 대개 20분을 못 넘기고 에이 다음에 보든가 하지 뭐 하고 꺼버리기 일쑤였다. 느린 템포의 영화를 좋아하지만, 이건 너무 정적 이었다.
대신 히로카즈가 쓴 소설 '걸어도 걸어도'를 샀다. 출퇴근 길에 오디오로 들을 책이 필요했는데, 마침 전자책으로 나와 있어서 들어 보았다. 역시 처음엔 지루했다. 가족을 소재로 한 이야기에 공감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소설 전반부가 다 지나도록 소설 속 '공간'은 움직이질 않았다. 계속 다다미가 있는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차 안에서 할 일이 마땅치 않으니 계속 참고 들었다. 껐다 켰다를 몇 번 반복한 끝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스토리의 대단한 전환이 있었다기 보다는, 어느 순간에서 부터 인가 히로카즈가 묘사하고 있는 인물의 작은 움직임, 대화의 미묘한 긴장감이 눈에, 아니 귀에 들어왔다.
다 큰 아들의 밥그릇에 먹다가 만 자기의 밥을 한 숟갈 척 올려 놓는 어머니. 밥 때만 되면 슬금슬금 방에서 나와 신문 펴는 아버지. 시부모님의 말다툼 사이에서 어색한 웃음 짓는 며느리. 부모님이 불편해서 부엌으로 피해 담배 피는 남편. 그 와중에 넉살 좋게 누워 낮잠 자는 매형. 진부해서 보편적인 이야기가 히로카즈의 세심한 글로 정성스럽게 포장되어 있었다.
일본 사람들의 심리는 참 독특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 했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한국 가족의 이야기라고 해도 전혀 어색할 것이 없었다. 히로카즈 감독은 '스페인에서도 토론토에서도 프랑스에서도 걸어도 걸어도 가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라는 관객들을 만났다'고 한다.
사랑하면서도 성가셔 하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어디에서나 마찬가지 인가 보다. 때론 이런 사실이 큰 위안이 된다. 정확히 말하면 위안 이라기 보다는 조금 덜 외로워 지는 느낌이다.
'걸어도 걸어도' 영화로 꼭 봐야겠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소심한 둘째 아들을 연기하기엔 너무 잘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