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민 Oct 21. 2016

14. 구찌와 닥스.

Lincoln way

열흘이 지났다. 할아버지가 이제 곁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감각은 또렷해지기보다 오히려 흐릿해 진다. 결국 나는 가보지 못한 채 장례는 정성스레 치뤄졌고, 가족들은 예기치 못하게 껴안아야 했던 슬픔을 담담히 놓아주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지, 할아버지를 떠나보냄과 얽혀있던 감정들이 조금씩 잠잠해 지면서, 지난 주의 일들은 실감되지 못하고 되레 내 주위를 미끄러져 흩어진다. 여전히 전화를 하면 반가이 맞아주실 듯 하고 한국에 들어가면 뵐 수 있을 것만 같다. 소중한 이가 곁에 있음 뿐 아니라 곁에 없음도 정말 '곁'에서만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맘이 죄송스럽다.


그래도 할아버지를 떠나보냄에 대한 무겁고 빈 마음이, 할아버지와의 소소한 추억들을 되뇌이며 조금씩 따스함으로 채워지고 있다. 내 나이 무렵의 어머니 사진 속에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건장하셨다. 며느리의 졸업식이라고 사진관을 찾아가 함께 포즈를 취했을 것을 생각하니 맘 속에 정다운 웃음이 돈다. 할아버지의 표정과 자세는 잔뜩 얼어있지만, 그 경직됨이 오히려 강직함을 부각시킨다. 그간 수척해지신 할아버지 모습에 익숙해져 예전에 건장하심을 잊고 있었는데, 참 반갑다.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풍채를 물려받았는데 나는 왜 이럴꼬.




구찌. 주말이나 명절에 할아버지 댁을 방문하면, 떠나기 전날 밤 즈음 나를 조용히 방으로 부르시곤 하셨다. 대개는 이때 용돈을 쥐어주시며 얼른 포게또에 넣어두라고 말씀하셨다. 하루는 평소와 다르게 서랍에서 검은 지갑 하나를 꺼내셨다. 할아버지 아는 부산에 있는 친구 분이 준 것이라며 구찌가 테두리에 새겨진 지갑을 건네 주셨다. '이게 진짜는 아니고 모조인데 질이 썩 괜찮다. 니 가져가서 쓸래?' 명품 쓸 일이 없던 나였고 모조품은 더욱 그러했지만, 왠지 진품도 아닌 가짜를 선물로 건네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재밌어서 냉큼 받았었다. 보통은 소지품을 고르는 데 꽤 까탈스러운 나인데 그 날은 어쩐 일로 가짜 구찌 지갑의 겉모습도 싫지가 않았다. 그렇게 받은 지갑은 미국 온 뒤로도 수년간 내 호주머니 속에서 유쾌한 기억을 품은 채 잘 버텨주었다. 그 구찌 지갑이 테두리가 닳아갈 무렵, 할아버지는 또 한번 나를 방으로 부르셨다. '니 전에 내가 줬던 거 아직도 쓰고 있나. 이건 내가 좀 쓰던긴데 가죽이다. 좋은기라.' 하시면서 명품은 아니지만 진품인 지갑으로 애프터서비스를 해주셨다. 가죽으로 된 새 지갑은 뻣뻣해서 정이 안가기 마련인데, 적당히 길들여진 갈색 가죽 지갑이 이번에 썩 맘에 들었다. 여전히 내 손으로 보살피고 있는 중이다.


닥스. 그러고 보면 할아버지는 물건에 대한 애착이 꽤 있으셨다. 정확히 말하면 '새' 물건에 대한 애정이라고 해야 할까. 요즘 기준으로는 활발한 소비자라고 결코 말할 수 하지만, 윗 세대임을 생각하면 할아버지는 구매의 기쁨을 일찍이 아셨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소파는 할아버지에게 늘 애물단지였다. 애써 장만한 녀석은 해가 지날수록 권태로움을 선사하여 새 옷으로 갈아 입거나 더 건실한 놈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구찌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할아버지는 메이커를 좋아하셨다. 일부러 찾아 구입하셨던 것은 아니고 알고 계시는 몇 개를 좋아하셨다. 그 중 하나가 닥스였다. 명절에 할아버지께 옷 선물을 할 때면, 어머니는 꼭 닥스 셔츠를 사셨다. 다른 브랜드가 천이 더 좋은 것 같긴 한데 닥스를 사야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실 거라면서. 정말로 할아버지는 선물로 받은 셔츠를 걸쳐 보시면서, '닥스 카는거 이거 좋은기제. 느그 엄마가 물건 볼 줄 안다.' 하며 흐뭇해 하셨다. 연세가 들어서도 취향과 싫증을 갖고 있다는 것, 풍부한 생동감으로 느껴져 좋았다. 나도 그런 부분을 꽤나 물려받은 것 같은데, 2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똑같이 한 책상 위에서 읽고 쓰고 있다. 참 기특하다.   




마음이 온화해진다. 할아버지도 같은 마음으로 보고 계실 거라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13. 식탁의 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