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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Oct 21. 2016

14. 구찌와 닥스.

Lincoln way

열흘이 지났다. 할아버지가 이제 곁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감각은 또렷해지기보다 오히려 흐릿해 진다. 결국 나는 가보지 못한 채 장례는 정성스레 치뤄졌고, 가족들은 예기치 못하게 껴안아야 했던 슬픔을 담담히 놓아주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지, 할아버지를 떠나보냄과 얽혀있던 감정들이 조금씩 잠잠해 지면서, 지난 주의 일들은 실감되지 못하고 되레 내 주위를 미끄러져 흩어진다. 여전히 전화를 하면 반가이 맞아주실 듯 하고 한국에 들어가면 뵐 수 있을 것만 같다. 소중한 이가 곁에 있음 뿐 아니라 곁에 없음도 정말 '곁'에서만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맘이 죄송스럽다.


그래도 할아버지를 떠나보냄에 대한 무겁고 빈 마음이, 할아버지와의 소소한 추억들을 되뇌이며 조금씩 따스함으로 채워지고 있다. 내 나이 무렵의 어머니 사진 속에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건장하셨다. 며느리의 졸업식이라고 사진관을 찾아가 함께 포즈를 취했을 것을 생각하니 맘 속에 정다운 웃음이 돈다. 할아버지의 표정과 자세는 잔뜩 얼어있지만, 그 경직됨이 오히려 강직함을 부각시킨다. 그간 수척해지신 할아버지 모습에 익숙해져 예전에 건장하심을 잊고 있었는데, 참 반갑다.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풍채를 물려받았는데 나는 왜 이럴꼬.




구찌. 주말이나 명절에 할아버지 댁을 방문하면, 떠나기 전날 밤 즈음 나를 조용히 방으로 부르시곤 하셨다. 대개는 이때 용돈을 쥐어주시며 얼른 포게또에 넣어두라고 말씀하셨다. 하루는 평소와 다르게 서랍에서 검은 지갑 하나를 꺼내셨다. 할아버지 아는 부산에 있는 친구 분이 준 것이라며 구찌가 테두리에 새겨진 지갑을 건네 주셨다. '이게 진짜는 아니고 모조인데 질이 썩 괜찮다. 니 가져가서 쓸래?' 명품 쓸 일이 없던 나였고 모조품은 더욱 그러했지만, 왠지 진품도 아닌 가짜를 선물로 건네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재밌어서 냉큼 받았었다. 보통은 소지품을 고르는 데 꽤 까탈스러운 나인데 그 날은 어쩐 일로 가짜 구찌 지갑의 겉모습도 싫지가 않았다. 그렇게 받은 지갑은 미국 온 뒤로도 수년간 내 호주머니 속에서 유쾌한 기억을 품은 채 잘 버텨주었다. 그 구찌 지갑이 테두리가 닳아갈 무렵, 할아버지는 또 한번 나를 방으로 부르셨다. '니 전에 내가 줬던 거 아직도 쓰고 있나. 이건 내가 좀 쓰던긴데 가죽이다. 좋은기라.' 하시면서 명품은 아니지만 진품인 지갑으로 애프터서비스를 해주셨다. 가죽으로 된 새 지갑은 뻣뻣해서 정이 안가기 마련인데, 적당히 길들여진 갈색 가죽 지갑이 이번에 썩 맘에 들었다. 여전히 내 손으로 보살피고 있는 중이다.


닥스. 그러고 보면 할아버지는 물건에 대한 애착이 꽤 있으셨다. 정확히 말하면 '새' 물건에 대한 애정이라고 해야 할까. 요즘 기준으로는 활발한 소비자라고 결코 말할 수 하지만, 윗 세대임을 생각하면 할아버지는 구매의 기쁨을 일찍이 아셨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소파는 할아버지에게 늘 애물단지였다. 애써 장만한 녀석은 해가 지날수록 권태로움을 선사하여 새 옷으로 갈아 입거나 더 건실한 놈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구찌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할아버지는 메이커를 좋아하셨다. 일부러 찾아 구입하셨던 것은 아니고 알고 계시는 몇 개를 좋아하셨다. 그 중 하나가 닥스였다. 명절에 할아버지께 옷 선물을 할 때면, 어머니는 꼭 닥스 셔츠를 사셨다. 다른 브랜드가 천이 더 좋은 것 같긴 한데 닥스를 사야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실 거라면서. 정말로 할아버지는 선물로 받은 셔츠를 걸쳐 보시면서, '닥스 카는거 이거 좋은기제. 느그 엄마가 물건 볼 줄 안다.' 하며 흐뭇해 하셨다. 연세가 들어서도 취향과 싫증을 갖고 있다는 것, 풍부한 생동감으로 느껴져 좋았다. 나도 그런 부분을 꽤나 물려받은 것 같은데, 2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똑같이 한 책상 위에서 읽고 쓰고 있다. 참 기특하다.   




마음이 온화해진다. 할아버지도 같은 마음으로 보고 계실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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