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를 구우며
살이 오른 조기를 구워 먹었다. 생선을 조리할 때면 기분이 묘하다. 죽어있는 생물을 한번 더 죽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마도 아직 붙어 있는 눈 때문일 것이다. 포획의 순간을 간직한 눈. 당황스러움과 억울함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눈 말이다. (요즘 채식주의자를 보고 있어 그런지 문장이 그로테스크 해졌다.) 그러고 보면 눈이 붙은 채로 파는 (죽은) 생물은 생선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왜 그럴까. 만약 닭고기에 눈을 붙여 판다면 절대 사지 않을 것 같긴 하다. 적어도 난 그렇다.
조기를 굽다보니 스멀스멀 올라오는 연기와 함께 노릿한 비린내가 집안 구석구석으로 번졌다. 꽁치 만큼은 아니어도 누군가 아파트 복도를 지나간다면 킁킁 거리며 잠시 걸음을 멈출 만한 냄새다. 예전 같았으면 생선 굽는 게 조심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혹여나 처음 맡는 비릿한 냄새에 심기가 불편해진 이웃이 항의해 올까 하는 염려에. 하지만 요즘은 밥 때가 되면 복도에 생선 냄새는 물론이고 고기 냄새, 카레 냄새를 비롯한 다국적 요리 냄새가 공존한다.
적어도 왜 이 냄새 나는 조기 따위를 먹는 거에요 라고 항의하는 이웃은 이제 없을 것이다. (그렇지도 않으려나) 여전히 대다수의 이웃은 스테이크를 먹으며, 여보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요 나라면 저런 냄새 나는 요리는 못 먹을 거 같아요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동네에서 엔지니어가 아닌 사람으로 산다는 게 때론 조기를 굽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당신은 어떻게 엔지니어가 아닌 직업으로 살아가나요 라고 묻는 사람은 없지만, 기술과 친하지 않은 사람도 잘 없다. 피자 가게 하나를 열어도 인공지능 로봇이 피자를 만들어야 혁신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딱히 이 의견에 반대하거나 토를 달 생각은 없다. 다만 어떤 일을 벌이든 여기선 실리콘 밸리 방식으로 해야 돼, 그래야 주목 받고 살아 남을 수 있어 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조금은 쓸쓸한 생각이 든다.
공존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보다. 어쩌면 공존이란 것은 다수의 입장에서는 포용적인 단어일지 모르겠지만, 소수에게는 여전히 암묵적 배제의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섬에 있는 사람에게는 공존을 넘어선 공감이 필요하다. 섬사람이 아직 연약해서 일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얘기가 괜히 거창해졌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쓰려 하면 꼭 그렇다. 그냥 가끔은 조기를 같이 먹을 사람이 몇몇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살이 발라진 생선을 사 먹지 그러냐 이런 말 없이, 그저 맛있게 먹어 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