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국을 끓일 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에요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난 글쎄요 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먹는 것 자체에 엄청난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만드는 건 좋아한다), 어떤 음식이든 한두번 먹으면 계속 먹어야지 하는 생각도 잘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계속 한가지 음식을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도 된장찌개 라고 작은 소리로 대답할 것 같다.
된장찌개 라는 말이 익숙해서 찌개 라고 했지만 사실 내가 좋아하는 건 된장국에 가깝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된장찌개와 된장국은 건더기와 국물 중 어느 것에 더 주안점을 두고 먹느냐에 따라서 엄연히 구분되는 음식이다. 국물에 더 무게를 둔 된장국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당연히 장맛 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 다시 멸치 라고 해도 크게 반대할 생각은 없다). 유학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끓였던 된장 반 청국장 반이 들어간 된장국의 맛을 잊을 수가 없는데, 그 후로 십년이 지난 여태까지 그 맛을 되살릴 수가 없다. 된장은 한국에서 보내온 집된장 이었던 것 같은데 그 후로 같은 맛이 나는 된장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한 축을 담당하던 청국장도 팔리지 않아서인지 이젠 한인 마트에서 구하기가 힘들다.
맛과는 별개로 된장국을 끓일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채소를 다듬을 때다. 다듬는다는 말이 과분할 정도로 사실 채소를 잘 씻고 썰기만 하면 된다. 주로 애호박 이라든가 버섯 이라든가 배추 같은 것을 준비한다. 장이 좋은 장이라면 채소는 뭐라도 크게 상관은 없다. 채소의 쓸모는 맛 이라기 보다는 보는 즐거움과 요리의 재미를 위해서 라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된장국에서 만큼은.
그 중에서도 애호박을 썰 때가 단연 좋다. 일단 썰면 나타나는 노르스름 하면서도 연두 빛을 머금은 단면이 좋다. 비슷하게 생긴 오이를 잘랐을 때 나타나는 단면보다 훨씬 온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썰 때 느껴지는 적당한 저항이 좋다. 너무 쉽게 썰리지도 너무 썰기 어렵지도 않아서, 내가 어떤 일을 해 내고 있다는 성취감을 맛 보게 해주는 동시에, 딱딱한 물체를 썰 때 흔히 느끼기 마련인 불안감은 안겨다 주지 않는다. 단호박을 가르려고 칼을 꽂을 때 느껴지는 서늘한 떨림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아도 된다.
반면 버섯 같은 채소는 너무 쉽게 잘려져서 시시하다. 송송 써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지만, 왠지 바람 빠진 고무공을 자르는 것처럼 다소 맥이 빠진다. 내 칼이 버섯을 지나 도마에 채 닿기도 전에 이미 다 잘려 버리는 것 같다. 내가 칼로 뭔가를 썬 것 같기는 한데 굳이 이 일에 칼까지 써야 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할까. 그런 점을 빼면 버섯은 완벽한 채소다.
모든 일이 딱 애호박만 같으면 좋으련만. 적당한 도전 정신을 고취 시키면서 적절할 때 보상을 주는 일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리고 애호박 써는 게 좋다고 그것만 많이 넣으면 배가 고파진다. 지금 상황이 딱 그렇다. 회식을 하고 돌아온 아내의 머리칼에서 나는 삼겹살 냄새가 나를 더욱 힘겹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