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상처는 치료해야 하는 것일까 위로해야 하는 것일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네 번째 장편소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에는 저마다 가슴 한편에 상처를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시구로의 이전 소설에서 전쟁과 같은 거대한 사건이 개인의 삶에 남긴 흔적에 대해 얘기했다면, 이번 소설은 보다 사소하지만 그래서 더 공감이 되는 사건으로 인해 미묘하게 뒤틀린 인물들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묘사되는 한 도시에서 주인공이 만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 아들, 동창, 그리고 그의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이다. 주인공은 이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인물들의 사연을 듣게 되는데 그 대화는 하나같이 본인이 풀지 못한 숙제를 하나씩 주인공 앞에 던져 놓는다. 주인공은 일정에 쫓기는 와중에도 여러 사람들의 부탁을 듣고 나름대로 도움을 주고자 하지만 일은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오히려 위안을 주지 못한 채 숨겨져 있던 인물들의 상처만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결말을 낳는다.
소설 도입부에서 등장하는 구스타프와의 대화는 이 소설의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에 대한 암시를 준다. 호텔에서 짐 나르는 일을 하는 포터 구스타프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가방을 내려놓아도 된다는 투숙객 라이더의 권유에 장황한 대답을 하기 시작한다. 본인이 나이가 들어 힘에 부침에도 불구하고 왜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여전히 드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지, 이전에는 세 개의 가방을 들었지만 지금은 두 개의 가방을 들기로 한 결정이 본인에게 얼마나 쉽지 않은 타협이었는지에 대해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될 개인적인 사연까지 꺼내어 설명을 하는 바람에 대화는 적당한 시점에서 종결되지 못한 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주인공 라이더는 구스타프의 일방적인 이야기를 단호하게 끊지 못하고 몇 마디 간결한 추임새로 대화에 개입하려고 시도하지만 이는 구스타프의 다음 이야기를 촉발시키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구스타프와의 대화는 대화라기보다는 차라리 독백이나 연설에 가까운데, 그 내용도 언뜻 보기에는 포터라는 직업에 대한 구스타프의 철학과 자부심을 전달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본인의 직업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하소연이 담겨있다. 이러한 대화의 패턴은 이 소설에서 피아니스트 라이더가 공연을 위해 방문한 소도시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과 나누게 될 대화의 전형이 된다. 대화는 일방적이고 길다. 대화 밖의 텍스트보다 오히려 대화 안의 텍스트가 이야기의 전개를 이끈다. 거기에는 각 인물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들어있고 사연은 하나같이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각자가 지닌 상처의 흔적을 발견하는 슬픔에서 기인한 것이다.
현실에서도 할 말이 많은 사람을 종종 만난다. 개인적으로 말을 길게 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말을 많이 하고 싶어도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듣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말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어색한 미소를 몇 번 짓다 보면 그 사람의 말은 대화를 시작할 때는 짐작하지도 못했던 공간을 향해 달려가 버리고 만다. 그나마 논리적 인과를 따라 이어지는 말이라면 대화의 몰입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상대의 눈과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내 손을 번갈아 바라보며 대화를 견디는 수밖에 없다. 일순간 손을 재빠르게 들어 올려 상대를 흠칫 당황하게 만든 다음 잠깐만요 지금 당신의 대화는 경로를 이탈한 것 같군요 라고 말하든지 혹은 조금 더 상냥하게 접시 위에 놓인 고구마를 하나 집어 건네며 잠시 이것을 입에 물고 계시는 게 어떨까요 라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을 증오하며 대화를 견뎌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누구나 맥락 없는 장황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침대 시트에 붙은 모기보다 더 두려워하게 된다.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계속하더라도 용납할 수 있는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이야기의 적재적소에 자리 잡은 위트가 긴 이야기의 지루함을 부드럽게 지워주는 경우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얼마나 '부드럽게' 이 작업을 할 수 있는가가 훌륭한 코미디와 그렇지 않은 코미디의 경계를 나눈다고 생각하는데 이시구로는 이 작업을 정말 능숙하게 해낸다.
이 소설의 위트는 상당 부분의 소설의 세심한 상황 설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소설 도입부의 구스타프와 라이더의 대화로 돌아가 보면, 이 대화가 소설의 주제에 대한 미리보기가 되기도 하지만 초현실적인 설정에 대한 암시를 주기도 한다. 구스타프의 대화를 읽으며 의아했던 점은 대화가 상당히 오랜 시간 진행된 것 같은데 사실 알고 보면 이 모든 것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짧은 시간 동안 이뤄졌다는 점이다. 은은한 시간과 공간의 왜곡은 주인공 라이더가 소도시를 배회하는 동안 계속해서 일어난다. 구스타프의 부탁을 받고 처음 만나러 간 그의 딸이 은연중에 라이더의 아내가 되어 있다든가, 호텔에서 나와 한참을 헤매다 찾아간 연회장이 사실은 원래 호텔에 딸린 공간이라든가, 처음 가는 갤러리 앞 주차장에 버려진 차가 라이더의 어린 시절 아버지가 몰던 차라든가 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야기가 늘어질 무렵 등장하는 초현실적 장치는 다시 이야기의 끈을 팽팽하게 조여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초현실적 설정은 라이더와 그를 취재하러 온 현지 사진기자들 사이의 대화였다. 라이더를 바로 옆에 두고 이 현지 기자들은 서로 라이더가 성가신 사람이라는 둥 내키지 않지만 그에게 아부해서 빨리 이 상황을 넘겨보자는 식의 험담을 하는데 이들은 라이더가 이 대화를 고스란히 듣고 있다고 인식하지 못한다. 이 대목에서는 와 정말 소설에서 대화를 이런 식으로 끌어가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지금 이 세 인물의 긴장을 드러내는 데 이것보다 더 적절한 희극적인 장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어느새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시구로의 소설이 초현실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대화에서 인물의 감정이나 심리에 대한 묘사가 섬세하고 개인적인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라이더가 만나는 다수의 인물들은 대화를 통해 그들의 가진 불안, 후회, 연민, 열등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감정들은 대화에서 강하고 분명하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흐릿한 단서를 통해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어서 인물의 심리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인물이 회상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차분히 들어봐야 했다. 특히 호텔 지배인 호프만이 자신과 아내 사이에 오랜 기간 존재하던 긴장의 실체에 대해 라이더에게 설명하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호프만은 고상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본인을 작곡가로 오해했던 아내에게 자신의 직업을 해명하지 않은 채 결혼하게 되고, 그 후 아내와 자신이 지닌 문화적 소양의 격차로 인해 열등감에 사로잡혀 결혼 생활을 해나간다. 호프만은 결혼한 지 3년째 되는 어느 날 퇴근길에 아내에게 선물할 시집을 사서 아내에게 건네었는데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아내가 뭐라고 말하기를, 고맙다는 말이라도 한마디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내가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러자 마침내 아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험악하거나 쌀쌀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이 아주 독특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눈으로 '확인하는' 사람의 눈빛이라고나 할까요. 예, 바로 그랬습니다. 그 순간 나는 아내가 드디어 나를 꿰뚫어 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긴장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깨달은 것도 그때였습니다. 나는 그동안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커다란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마침내, 마침내 아내는 나를 꿰뚫어 본 겁니다. 나는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모릅니다. 나는 커다란 해방감을 느끼고 큰 소리고 외쳤습니다. '하!' 그러고는 미소를 지었지요.
라이더가 방문한 도시의 사람들은 각자가 가진 어떠한 결핍을 드러내는 것에 꽤 솔직한 듯 보인다. 소설의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여러 사람들의 결핍은 한 데 묶여 고립된 도시에서 일종의 염원을 구성한다. 저물어가는 작은 도시의 재도약을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은 직접적인 해결책을 향하기보다는 간접적인 위안을 향한다. 그들이 바라는 위안은 표면적으로는 음악이라는 예술을 통한 문화적 부흥으로 그려지지만 실상은 집단적으로 자기들 자신의 쇠락한 내면을 재확인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심에 '목요일 밤의 콘서트'라는 행사가 있고, 이 행사를 통해 도시를 구원으로 이끌어야 할 피아니스트 라이더와 지휘자 브로즈키가 있다. 라이더가 외부에서 초청된 구세주라면 브로즈키는 도시 내부의 열화로 만들어진 신이다. 사실 브로즈키는 신이라고 하기엔 그 모습이 너무 위태로워서 신성한 행사에 바쳐질 제물이라는 편이 더 맞는 설명일지도 모르겠다. 한때 인정받는 음악가였던 브로즈키는 중독으로 얼룩진 타락의 길을 걸었지만 말년에 꺼져가는 도시의 마지막 희망으로 추대받으며 다시 명예회복을 꿈꾸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도시의 기대와 경멸을 한 몸에 받아 온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시 사람들의 내면을 대변하고 있는 주체이기도 하다.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화두인 상처에 대해 그는 본인의 상처에 대한 양가적 감정에 대해 말한다. 좋은 상처는 사람을 매혹시킬 수 있다고 하며 상처를 누르면서 느껴지는 달콤한 감각을 즐긴다고 말했다가도, 오랜 친구처럼 변함이 없는 상처가 영원히 낫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싫증이 나고 아주 지겨워진다고 말한다. 브로즈키는 상처의 치유를 부정한다.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아픔을 낫게 하려면 무엇 때문에 울게 되었는지 내 주변에 스스로 담벼락을 쌓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테지만 브로즈키는 상처의 실체를 바로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마음의 상처가 있었는지를 묻는 라이더의 질문에도 자신은 몸에 있는 물리적인 상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옛날에 축구 시합을 하다가 발가락을 다쳐 상처가 있다는 식으로 얼버무려 버린다. 대신 브로즈키는 헤어진 아내 콜린스 여사와의 재결합을 통해 그저 상처에 대한 위안을 구할 뿐이다.
당신의 상처, 그놈의 시시한 상처!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한 건 그 상처예요. 그 상처야말로 당신 평생에 단 하나뿐인 진정한 애인이에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 한번 무언가를 이룩한다 해도,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뻔해요. 음악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사람들이 오늘 밤 당신을 인정했다 해도, 당신이 이 도시에서 저명인사가 되었다 해도, 당신은 그걸 모조리 파괴할 거예요. 모든 것을 박살 내고, 전에도 그랬듯이 당신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거예요. 그건 다 그놈의 상처 때문이에요. (...) 당신의 상처는 조금도 특별한 게 아니에요. 절대로 특별하지 않아요. 이 도시에서만도 그보다 훨씬 심한 상처를 가진 사람이 수두룩해요. 난 그걸 알아요.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당신보다 훨씬 용감하게 견뎌 내고 있어요. 그들은 계속 살아가요. 그래서 가치 있는 사람이 되죠.
콜린스 여사의 대답이다. 내가 가진 상처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이 시시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