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민 Jul 12. 2020

왜 애플파이를 굽는가



애플파이를 왜 굽는지를 알려면 애플파이의 정의를 알아야 한다. 


1. 애플파이란 누군가에게 이거 내가 구웠어하며 선물하기 좋은 요리다. 

선물이란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에게 제가 당신을 몹시 아낍니다 라는 마음을 전달하는 행위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주는 사람의 정성이다. 많은 경우에 정성은 한 사람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꺼이 희생함으로써 표현되는데,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누구도 포기하려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다름 아닌 그 사람의 시간이다. 파이를 굽는 것은 내가 가진 시간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파이를 굽는 것은 마트에 가서 사 오면 삼십 분 안에 해치울 수 있는 일을 반나절에 걸쳐서 해내겠다는, 경우에 따라서는 두 번의 반나절을 온전히 소비하겠다는, 비효율의 일상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이러한 선언 혹은 남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주 내에서의 저항심은 사실상 훌륭한 요리를 하기 위해 개인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덕목이다. 애플파이를 굽기 위해 자정까지 반죽을 치대는 사람에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당신은 지금 당신의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라고 결코 훈계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사람은 비효율을 선택한 대가로 당신이 경험하지 못하는 침묵과 감각의 시간을 보상으로 얻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플파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정의를 내려볼 수 있다.  


2. 애플파이란 조용한 감각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이 만들어 내는 요리다. 

요리는 기본적으로 혼자서 하는 일이다. 당신이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거나 명절에 전을 부칠 때에만 요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이 만드는 요리는 개인 작업일 확률이 높다. 혼자서 일을 할 때는 옆자리 직원의 헛기침 소리, 사장님의 고함 소리와 같은 불필요한 소음이 사라진다. 심지어 파이를 만들 때에는 다른 요리를 할 때처럼 칼과 냄비 같은 철제 도구들이 부딪히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파이를 굽는 것은 침묵의 공백 속에서 감각하는 것이다. 손이 밀가루를 쓰다듬는 소리, 버터가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소리, 반죽이 유리그릇을 스치는 소리는 침묵의 밀도를 더해줄 따름이다. 여기에서 다시 애플파이를 정의할 수 있다.  


3. 애플파이란 그 침묵의 시간을 지나다 보면 생겨나는 산물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는 것에 대한 그의 산문 ‘걷기 예찬’에서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며 주위에서 울려오는 소리들을 음미하고 즐기는 것이다, 침묵은 감각의 한 양식이며 개인을 사로잡는 어떤 감정이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침묵을 통해 더 많은 것을 감각할 수 있다. 시끄러움 속에서는 감각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어떤 것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밀가루에 버터를 으깨며 반죽을 하고 있으면 어떻게 이 많은 가루들이 순식간에 (비교적 순식간에) 엉겨 붙어 덩어리를 이루는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버터가 밀가루를 엉겨 붙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버터에 있는 수분이 밀가루를 엉기게 한다. 우리의 손이 버터에 닿아 체온으로 버터를 녹이면 버터에서 수분이 빠져나와 밀가루에서 글루텐이 형성되는 것을 돕는다. 맞다. 그 글루텐이다. 온갖 오명을 뒤집어쓴 죄인이 된 글루텐. 글루텐은 단지 빵을 쫄깃하게 만드는 단백질에 불과하다. 수분은 글루텐이 길어지게 해서 빵을 쫀득하게 하고 버터는 글루텐이 길어지는 것을 막아 빵을 부스러지게 한다. 따라서 얇게 부스러지는 애플파이 크러스트를 원한다면 쉽게 녹지 않도록 차가운 버터를 쓰고 버터가 밀가루 반죽에 섞일 정도로만 가볍게 치대는 것이 좋다. 누군가가 그래서 당신은 바삭하고 부스러지는 크러스트를 만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나는 침묵을 택할 것이다. 침묵에는 감각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으므로. 쫀득한 애플파이를 좋아하는 사람 열두 명쯤은 지구 상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가끔 그 열두 명을 위한 파이가 만들어졌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쯤에서 애플파이를 다시 정의 내릴 수 있다.  


4. 애플파이란 결과물의 질감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리는 아니다. 


5. 애플파이란 내용물의 질감도 그렇게 중요한 요리는 아니다. 

애플파이를 만들기 위해 7500 가지의 사과를 모두 테스트해 본 것은 아니지만, 나는 애플파이에 어떤 사과가 제격이냐 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그렇게 결정적인 이슈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주로 아오리 사과와 비슷하게 생긴 연두색의 아삭아삭한 그래니 스미스 사과를 넣지만 후지 사과를 썼을 때보다 특별히 더 맛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신맛이 나는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은 매킨토시를 넣으면 되고, 새빨간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은 홍옥을, 경제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가장 저렴한 사과를 넣으면 그만이다. 설탕도 마찬가지다. 백설탕이든 흑설탕이든 심지어 마스코바도 설탕이든 찬장의 문을 열고 지금 그 안에 있는 설탕을 쓰면 된다. 체리파이, 라즈베리파이, 크랜베리파이를 제쳐두고 애플파이를 만들기까지 우리는 이미 수많은 고민과 괴로운 선택을 반복하지 않았는가. 특히 과일을 비롯한 식료품의 종류가 필요 이상으로 많은 미국 마트에서 후회하지 않을 물건을 고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피로한 일이라는 것은 다들 공감하리라 믿는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애플파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6. 애플파이란 흔히 알려진 것처럼 미국 고유의 음식인 것은 아니다. 

‘애플파이만큼이나 미국적이다(as American as apple pie)’라는 말처럼 애플파이는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음식으로 자리매김했지만 다들 생각하는 것처럼 애플파이가 미국 고유의 음식인 것은 아니다. 당신이 사과의 기원을 찾아 떠난다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사과나무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파이 크러스트 위에 구워진 사과의 역사를 파헤친다 해도 미국의 추수감사절 테이블이 아닌 14세기 영국 시골의 한 식탁을 마주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 애플파이가 단순한 디저트가 아니라 애국의 정서를 담은 미국의 심벌이 되기까지는 20세기 초반 매스 미디어와 광고의 역할이 지배적이었다. 1902년 뉴욕타임스는 애플파이를 미국 번영의 동의어, 영웅들의 음식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 대전 때 언론은 참전 용사들의 소식을 전하면서 그들이 그들의 어머니와 애플파이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보도하여 애플파이를 가정과 조국을 대표하는 상징적 위치에까지 올려놓았다. 전쟁이 끝나자 애플파이는 한때 미국이 추구했던 건전하고 정감 있고 순수하고 고귀한 이상을 품은 국가적 은유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미국인들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당신들이 그토록 아끼는 애플파이가 정말 미국 음식이 맞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식재료는 인간이 움직이는 곳을 따라 이동하기 마련이다. 조리법은 새로운 문화의 틀 안에서 재해석될수록 요리의 맛이 풍부해진다는 것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애플파이는 미국 음식인가가 아니라 왜 애플파이는 ‘미국적인’ 음식인가 라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애플파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끌어낼 수 있다.   


7. 애플파이는 여전히 미국적인 음식이다. 

그래도 애플파이가 여전히 미국적인 음식인 이유는 애플파이가 번영과 애국의 상징이기 때문이 아니라 애플파이가 미국 밖에서 유래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미국으로 들어온 애플파이는 오래지 않아 미국에서 수확한 사과로, 미국에 살고 있는 가정의 형편에 따라 조리되어, 미국이 기념하는 추수감사절과 같은 기념일마다 식탁에 올려질 만큼 미국의 문화로 훌륭하게 자리 잡았다. 바꿔 말하면 미국밖에 있던 것이 미국 안으로 들어와 미국 문화가 되었기에 애플파이는 미국적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지금의 미국은 여전히 미국적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이 시기에 외국인 학생들을 미국 밖으로 내쫓는 상황을 보면 더욱 그렇다. 명목상으로는 대학들이 온라인 수업을 줄이고 다시 오프라인의 대면 수업을 개설할 것을 촉구하는 정책이라고 하지만, 그 방법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장 불안한 위치에 있는 학생들을 희생시켜서 달성하려 한다는 점에서 마음이 쓰라린다. 나는 여전히 미국이 외국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드는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나라라고 믿는다. 나 역시 지금까지 미국적이었던 과거의 미국에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다. 미국을 표현하는 클리셰가 되어 버린 멜팅 팟처럼 꼭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한 데 녹여 걸쭉한 수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글루텐이 손에 손을 잡고 끈적끈적한 반죽을 만들 때까지 치대어 보자는 것도 아니다. 버터 큐브 하나하나가 밀가루 반죽 사이사이에 끼어 있을 정도만 되어도 충분하다. 이 상태에서 버터는 열을 받아도 흐물흐물 녹아내리지 않고 스팀이 되어 하얀 밀가루 사이에 에어 포켓을 만든다. 가장 맛있는 애플파이가 만들어질 때처럼.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미국 대학에서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는 외국 학생들이 미국에서 추방 당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학생들이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아래 링크를 통해 청원에 동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s://bit.ly/2ZkoNEP


https://www.youtube.com/watch?v=iN0WWZT1YsA

매거진의 이전글 37.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