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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Sep 05. 2015

1. 꾸준히 기뻐할 수 있을까.

Pacifica

오히려 침착해 졌다. 막판에 몰려드는 초조함으로 스스로를 몰아세워 한 가지 일에 자신을 쏟아낸 후 드는 감정이 그랬다. 굉장한 성취감이나 좌절감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찾아오는 것은 몽롱한 평온함이었다. 간밤에 연구 결과들을 정리하고 아침에 발표를 했다. 한두번 해온 일도 아닌데 준비하면서 긴장을 했다. 그러고서 막상 발표를 시작하니 담담해졌다. 말로 생각들을 털어내면서도 뭔가 개운하지가 않았다. 그 과정이 끝나니 묘하게도 침착해졌다.


이런 비슷한 감정의 주기가 반복된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다 그것에서 빠져나왔을 때 조용한 외로움이 찾아온다. 연구실 밖으로 나온다. 햇살이 좋다. 차를 탄다. 남쪽으로 향한다. 고속도로를 달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의 분주함은 사라진다. 급격한 커브길을 돌아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익숙하지만 새롭다. 또 반갑다. 태평양이 거기 있다. 수평선이 아득하다. 바다가 산처럼 높게 느껴진다. 바다 밑으로 들어가듯 도로가 이어진다. 바다 옆 사람 사는 동네가 보인다. 동네가 가까워진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동산과 그 동네 사이에 차를 멈추고 내린다.



바다로 향하는 길을 걷는다. 아직은 바다가 보이지 않는 길이다. 오히려 울타리 옆으로 난 숲길과도 같다. 언제 처음 이 길을 알게 되었나 생각해 본다. 이내 처음 이 길을 발견하고 설레는 맘으로 걷고 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5년은 더 된 일일 것이다. 그때부터 이따금 이곳을 찾곤 한다. 그간의 나의 일기들이 곳곳에 쌓여있는 듯 하다.  빈 마음으로 천천히 걷기만 하던 때. 애착하던 것을 놓아야 했던 때. 애정이라 불릴만한 것을 시작하던 때. 우연히 들어선 낯선 길이 너무 좋았을 때. 여정의 시작을 사진으로 담았을 때. 예기치 않은 언짢은 핀잔을 들었을 때. 저기 보이는 저 동산 언저리를 걸으며 마주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어머니. 엄마와 함께 해 지는 시간들을 걸으며 멈춰섰을 때.


언덕을 오른다. 이번엔 셋이다. 셋이 함께 오른다. 바람이 강하다. 바람에 빗겨서서 걸음을 옮긴다. 생명이 태어나던 순간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얼마 전 딸 아이를 낳은 친구가 말한다. 자신을 닮은 아이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을 때의 그 생경함에 대해서 말이다. 자신은 그 낯섬에 놀라 순간 병원을 뛰쳐나와 얼마간 주위를 배회했었다고. 그런데 그 후에 밀려오는 기쁨이란 것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지속되는 무한한 기쁨이었다고. 무심한 듯 얘기하던 친구의 목소리에 이전과 다른 확신이 배어있다.


"언제 내가 그런 꾸준한 기쁨을 맛보았던 적이 있었나 싶어."



그래 참으로 그렇다. 무언가에 마음이 동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 지는 게 자연스런 일인데 말이다. 그래서 다른 설렘을 찾아 떠나고 얼마간 만족하였다가 또다시 갈급해 지곤 하는 일. 이것이 보통의 마음일진대, 이것에 빗겨선 한결같은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한결같을 수 없는 인간에게 한결같은 기쁨이 주어진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아름다운 일이다.




바람이 좋다. 동산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본다. 주위의 낮은 봉우리들을 올려다본다. 둥글다. 완만하다. 여러 번 보았지만 여전히 그렇다. 그래도 지겹지가 않다. 그렇게 모나지 않은 모습으로 꾸준히 있어주어 고맙다.




사진첩: instagram @ peter.s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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