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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의 Konadian Life Jun 28. 2020

설악에서 록키까지

여행을 떠나다.

여행.




나는 어릴 적 아버지께서 충남 대천에 소재한 여자 중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재직을 하셨던 덕분에 여름철마다 가까운 거리에 있던 대천해수욕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낼 수 있었다. 아침마다 모래사장을 산책하시던 아버지 손을 잡고 숙소에서 나와 골목을 따라 바닷가 모래사장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건물 틈 사이로 아침햇살에 반짝이며 파도치는 파란 바다 수평선의 모양이 둥근 공처럼 보였던 것이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 가장 각인되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러고 나서 숙소에 돌아오면 어머니께서 석유곤로에 불을 붙여 아침을 준비해주시고 누나와 형 그리고 나는 다시 모래사장으로 뛰어나가 물놀이 공을 차면서 한참을 뛰어놀았던 기억이 있다.

아내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에게 1970년대 당시에 가족동반 여행이라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었음에도 여름철이면 매번 해수욕장에서 바캉스를 즐기면서 자랐다며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님 밑에서 자란 자신과 비교하면 금수저가 따로 없었다고 은근히 부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곤 한다. 사실 당시에는 우리 가족이 대천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여름 방학 기간 동안 해수욕장을 며칠 동안 다녀온 것 말고는 여행이나 다른 것을 누린 기억은 없다.

대천해수욕장에서의 어느 여름날

우리 가족이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은 그저 명절에 강원도에 있던 큰아버지댁이나 할머니를 모시며 농사를 짓고 사시던 충북 진천의 작은아버지 댁을 방문했던 것이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의 여행 같은 여행 아닌 여행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이 아닌 친구들과 함께 처음 떠난 여행으로는 고등학교 2학년 봄에 다녀왔던 3박 4일짜리 수학여행이 가장 긴 시간, 가장 멀리 떠나본 여행으로 기억된다. 

천안에서 출발한 관광버스는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버스 안에서 친구들과 함께 어머니께서 싸주신 김밥으로 첫날 점심을 먹고 추풍령 휴게소를 첫 기점으로 경주를 거쳐 울산, 포항을 지나 동해안을 따라 설악산까지 이어지는 길에서의 풍경은 처음으로 집을 떠나 여행하는 나에게 참으로 새로웠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생각난 것인데, 그 새로운 풍경을 담기 위해 사진관에서 빌려갔던 올림푸스라는 카메라도 대단한 물건이었다. 왜냐하면 24컷짜리 필름을 반으로 나누어 50장으로 만들어 찍을 수 있어서 당시 학생들 사이에 꾀나 인기가 있었다.

수학여행 기간에 먹었던 단체도시락이나 숙소에서 제공한 식사는 열악했고, 좁은 방에서는 열명에서 스무 명이 누워서 잠을 청하기엔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여행이었지만 가장 즐거웠던 시간들로 기억에 남아 있다.

검정 교복을 입은 남자고등학교 2학년생들의 눈에는 천년 고찰인 불국사의 아름다움이나 석굴암의 신비함보다 보문단지에 주차되어 있던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학여행단의 여고생들 모습에 더 관심이 있었고, 포항제철의 붉은 쇳가루에 덮인 산업현장은 뒷전이고 수학여행에 동원된 관광버스에 한 명씩 배치되었던 안내양 누나의 미소에 신경이 쓰이던 때였다.

하지만 설악에 도착해서 바라본 울산바위의 웅장하고 거대한 산세는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수학여행의 일정상 울산바위는 오르지 못했고 흔들바위를 다녀온 후로 설악에서의 수학여행 기억은 없다. 수학여행 후에도 한동안 울산바위를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 후로 울산바위를 직접 오른 것은 대학 4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다녀온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들여다보는 예전 앨범을 열어보면 요즘 같은 고화질의 선명도는 아니지만 사진 한 장 한 장에 담긴 당시 풍경과 친구들 모습은 아직도 선명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울산바위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울산바위를 보면 왠지 숙연해지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 있을 때 해마다 한두 번씩 강원도를 여행하면 늘 설악에 들러서 한계령으로 돌아오거나 때로는 강릉방향의 대관령으로 돌아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울산바위를 보고 돌아왔다. 나는 울산바위를 통해서 자연의 위대함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고, 인간은 자연에 한 점으로도 표시할 수 없다는 것을 되새길 수 있었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전라남도 해남이 고향인 동창의 고향집을 비롯해서 땅끝 토말과 대흥사를 태풍 속을 헤치며 도보여행을 했었다. 1985년 당시에도 정말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오지였던 해남으로 기억한다. 친구와 처음 도착할 때에는 호남선 기차를 타고 광주 다음 역인 송정역에서 내려서 시외버스를 이용해 해남읍에 들어가기 전 시골 어딘가에서 하차해서 한 시간 정도를 배낭을 메고 걸어서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해남읍에서 버스가 하루에 아침저녁으로 딱 두 번만 운행하는 시골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친구 부모님께서는 장남의 친구들이 먼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 주었는데 대접할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시며 도착할 때부터 토종닭을 잡아서 닭볶음탕을 만들어 주셨고, 온갖 반찬과 음식을 만들어 주시기까지 했던 어머니께서는 우리가 친구 집을 떠나올 때에는 개개인의 배낭에 마늘을 한 접씩 담아주시기도 해서 정말 황송한 대접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입대 직전에는 고등학교 동창들과 지리산 종주를 한답시고 화엄사 뒤쪽 언저리 계곡 근처에 수영장이라고 해도 좋을 물웅덩이가 있어 바로 옆에 있는 캠핑장에 텐트를 치고 나서 바로 앞에 펼쳐진 코재라는 언덕길을 오르기가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알고 3박 4일 동안 물놀이하다가 마지막 전날에 겨우 노고단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온 적이 있다. 당시에는 도로포장이 되지 않아서 노고단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코재를 올라 10km가량 산을 타고 걸어가는 길뿐이었다. 그것이 아쉬워서 제대 후에 다시 친구들과 뭉쳐서 같은 루트를 올라갔다 내려와 바로 밤기차를 타고 다음날 계룡산 등반을 목표로 갑사에서 동학사로 넘어가던 중 산 중턱에서 해가 지는 바람에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던 참에 산에서 느지막이 하산하시고 있던 나물 캐는 아주머니들을 만나 간신히 산을 내려오기도 했던 추억도 있다. 그 뒤로도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친구들과 함께 무주구천동 계곡이나, 화양계곡, 무릉계곡 등으로 텐트를 짊어지고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대학 졸업을 몇 달 앞두고 갑자기 생각지도 않던 취업이 되었다. 그 바람에 형과 컴퓨터 판매사업을 하기로 해서 구입했던 승용차를 면허가 없던 형에게는 무용지물이라고 네가 가지고 다니라는 말에 얼떨결에 자가용족이 되었다. 덕분에 결혼 전에는 아내와 연애하는 4년 동안 틈만 나면 전국으로 여행하며 돌아다녔다. 원님 덕에 나팔을 불고 다닌 격이었다.

결혼 후에는 아이들이 생기고 나서부터 우리 집 아이들 또래의 아이들이 있어서 잘 어울리는 직장 동기들 몇몇이 모여서 단체로 움직이는 계획을 짜고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여름엔 바다나 계곡을 찾았고, 겨울에는 스키장에 리조트를 찾아다녔다. 다행스럽게도 다니던 직장에서 해마다 여름에는 강원도 용평에 소재한 리조트에 휴양소를 운영했고, 사계절 이용할 수 있는 회사 소유의 콘도가 여러 개 있어서 가까이 지내던 동기들이 돌아가면서 콘도를 신청하고 사용해서 수시로 콘도를 사용할 수 있었다. 친한 친구 가족들이 모여서 먹거리며 즐길거리를 챙겨서 떠나면 어디든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막상 한국을 떠나올 때 그 친구들보다 친구의 부인들과 아이들이 내가 없는 것을 걱정하며 아쉬워했다. 그것은 주로 여행 계획을 짜고 단체로 떠나는 가족여행을 진두지휘하던 대장? 없어진다는 것에 대한 상실감이 크게 작용했던 때문이었다. 지금도 내가 한국에 나가서 만나거나 간혹 통화를 할 때면 늘 예전에 단체로 아이들 데리고 시끌시끌하게 떠났던 여행 이야기를 한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형제 이상으로 관계를 맺고 함께 여행을 하고 집집에 모여서 음식도 해 먹고 애경사를 함께 나누면서 지냈던 시간들이 정말 좋았다. 우리 가족이 한국을 떠나 해외 이주를 결정하고 나서 두 가족은 우리를 따라 이민할 생각도 했을 정도였다. 그중 한집은 두 딸아이를 유학시켜서 우리 집에서 두 아이가 2년씩 돌아가며 머물기도 했었다.


여행은 가끔 무작정 떠날 때가 더 신나고 재미있다. 한 번은 직장을 그만두고 천안에서 학원을 운영할 때 아내와 토요일 아침에  아이들(당시 큰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작은아이는 유치원에 다닐 때)을 데리고 드라이브나 하자고 차에 태워서 잠깐 다녀온 곳이 거제도였다. 당시 아내에게 우리 큰아이가 초등학생이라서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견학하러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드라이브를 조금 멀리 나온 것뿐이라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아내와 함께 웃음을 참느라 애먹었던 기억이 있다.




캐나다에 도착해서 처음 여행을 떠난 것은 Jasper National Park이다. 타지에 나와서 지내던 중에 우연히 한국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집에 한두 번 왕래했던 두 집과 함께 겨울 여행을 나섰다. 그것도 에드먼튼 온도가 영하 35도를 찍던 날 차도 제대로 히팅이 되지 않아서 차유리 안쪽으로 성에가 끼어서 밖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의 악조건이었다. 게다가 두 시간 정도 운전하고 보니 뒷바퀴 한쪽이 타이어 옆면에 긁힌 자리가 보여서 스페어타이어로 교체하고 나서 운전을 하니 불안한 마음에 국립공원이고 뭐고 그냥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에드먼튼에서 5시간이나 걸린 겨울길을 운전하고 도착한 Jasper는 조그만 시골 동네 규모로 꽁꽁 얼어붙은 겨울은 그다지 여행지로 볼거리도 찾기 어려웠다. 불안한 마음에 타이어를 새것으로 갈아 끼울 마음을 먹고 근처에 타이어 가게를 찾아서 가보니 내차에 맞는 타이어도 없을뿐더러 예약을 하지 않아서 타이어가 있어도 끼울 수 없는 뭐 그런 애매한 상황이었다. 우선은 비상용 타이어가 제 역할을 잘해주기만 막연하게 바라면서 Jasper 길가에 있는 피자가게에 들어가서 장작으로 구워내는 피자를 시켜 놓고 추운 몸을 녹였다. 잠시 후 커다란 피자를 나무판 위에 올려서 서빙을 해준 파란 눈의 아저씨에게 땡큐를 읊어주고 모두 테이블에 둘러앉아 엉성하게 생긴 피자 세 판을 게눈 감추듯 없애고 이왕 나온 김에 한 군데라도 구경을 하고 가자는 집이 있어서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자기차는 내차보다 더 낡았는데도 걱정 안 한다는 말로 나를 위로하면서 앞서 나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막상 Maligne Canyon이라는 곳에 도착하니 온통 눈밭에 온도는 더 떨어져서 영하 42도가리키는 강추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단단히 여미고 아이들 모자에 장갑을 챙겨서 나섰지만 딸아이가 몇 발을 떼다 말고 춥다고 하는 말에 뒤도 안 돌아보고 차로 데리고 들어와서 시동을 걸고 다른 사람들이 돌아올 때까지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 히터를 틀고 아이의 손을 녹여주었다.

Maligne Canyon (Jasper National Park)

 영하 20도니 영하 40도니 하는 온도는 한국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겨울 온도이지만 막상 닥치면 이겨낼 수 있는 정도의 날씨이다. 내륙지역의 건조함이 있기에 이곳은 겨울에 내리는 눈이 뭉쳐지지 않고 마치 밀가루 같이 흩뿌려지는 형태를 보인다. 습도가 높은 한국의 추위와 비교한다면 에드먼턴의 영하 25도는 한국에서의 영하 5도에서 10도 사이 정도라고 하면 비슷한 느낌일 것 같다. (영하 25도를 기준으로 보면 이곳에서 숨을 들이마시면 콧속에 냉기가 멈추고 어는듯한 느낌이 든다)

아무튼 힘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눈밭에서 뛰어다니는 엘크를 보고는 인간의 나약함을 다시금 깨우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우리 가족은 몇 년 동안 겨울 여행을 나서지 못했다.




여행 = 행복

이라는 생각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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