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eter의 Konadian Life Feb 25. 2021

친하고 오래된 놈

국민학교 시절부터 사회생활 친구까지

친구는 참 많다.






한자 어원을 찾아보니

친할 親    옛(오랠) 舊

라고 쓰여있다. 

잠시 인터넷을 찾아보니 친구를 대신할만한 동무라는 단어도 보인다. 동무라는 말은 6.25 전쟁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 북한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인식되면서 금기어처럼 되어 버리지 않았나 싶다. 나의 경험으로도 70년대 이후 당시의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녔던 세대에게는 암묵적으로 사용하지 않거나 기피하는 단어였다. 1970년대 당시 소년중앙, 새소년 같은 어린이 잡지 중에 '어깨동무'라는 것이 그나마 동무라는 낱말을 자연스럽게 만나 볼 수 있었던 것이 전부였던 기억이다.  


친구라는 단어의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사이가 바로 친구다. 나와 같은 세대에서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바로 '나이가 같은 한동네에  사는 학교 친구'이다. 우리 세대가 생각하는 친구는 같은 나이에서 시작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어렸을 적 기억을 되짚어 보면 당시 국민학교 1학년 때까지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충남 대천에서의 학교생활이나 친구들 기억은 거의 없다. 머리가 나쁜 탓일게다. 2학년 초부터 천안으로 이사한 후 학교 생활을 새롭게 할 때 기억으로는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나오면 정면에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골목길이 있고, 양옆으로 학교 담을 따라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지는 골목길까지 전부 네 갈래 길이 있었는데, 지나갈 수 있는 골목마다 한집 건너 하나씩 친구들이 살고 있을 정도였다. 왼쪽에서 두 번째 골목으로 5분 정도를 걷다 보면 공터가 나오고 바로 왼쪽 모퉁이로 돌아 나가면 두 번째 파란 철대문이 우리 집. 그렇게 대문을 열고 들어서며 "엄마!"하고 소리를 지르면 안에서 "막내 왔니." 하는 어머니대답이 들려야 안심을 하고 밖으로 나가 놀던 그때가 지금도 생각난다.

여름철이면 집 앞 공터에 심어놓은 들깨가 내 어깨까지 올라와서 진한 깻잎 향이 동네를 가득 채울 때 즈음 친구들과 나는 그 깨밭 사이사이로 뛰어다니면서 숨바꼭질도 하고 가까웠던 학교까지 뛰어가 자치기와 비석 치기 그리고 오징어 가이생을 했다. 그때 친구라는 것이 얼마나 좋았던지 서로가 저녁밥을 먹으러 오라는 엄마들의 외침을 못들은척하며 어둑해지는 동네 골목을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아직도 그때의 골목길이 눈에 선하다.

당시 우리 동네에 냉장고라는 귀한 물건이 있는 집은 없었고, 동네를 통틀어서 TV라는 것도 몇 집 없던 시절이다. 그마저도 컬러가 아닌  흑백으로 말이다. 해질 무렵이면 친구 집에 들어가 만화책을 손에 쥐고 라디오 드라마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를 듣는 동안에 주인공들과 함께 악당인 파란 해골 13호를  잡으러 상상의 날개를 펼치기도 했다.


한국은 일단 유치원을 가더라도 한 살이라도 많으면 형이고 누나라고 가르치면서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나이가 같으면 친구라고 한 자락 깔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분위기가 대다수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한국의 어느 방송국에서인가 유치원 어린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거기에서도 아이들이 얼굴을 보자마자 너 몇 살이냐? 내가 형이다. 너는  동생이다.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온 대화의 내용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정말 나이가 같아야 친구일까?


요즘 같은 시대에는 멀리 있거나, 얼굴을 대면하지  않거나, 나이가 같지 않더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특히 캐나다에서 지내는 동안 한국에서의 친구라는 개념과 캐나다의 친구라는 개념이 무척이나 다르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우리 집 둘째는 이곳에서 초등학교 3학년부터 다녀서 한국에서 알고 지냈던 친구보다 이곳 친구들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까지는 학교나 성당에서 만난 친구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파트타임으로 알바를 하면서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11학년 때부터는 스타벅스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면서 친하게 지내게 된 대학생들과는 지금도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그리고 개인적인 기념일도 함께 하면서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중에 메이라는 친구는 4살이 많고 처음 만났을 때 간호대학 학생이어서 둘째에게 진로에 대한 상담도 많이 해주었다. 애슐리도 앨버타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는 2살 많은 대학생이었다. 교육대학과 간호대학을 놓고 진로 고민을 하고 있던 둘째가 메이로부터 간호대학 관련된 전공과목과 기타 실습 관련 내용들에 대한 상담을 받고, 애슐리가 교육대학에 대한 조언을 많이 해준 덕분에 둘째가 선생님의 꿈을 키울 수 있는 교육대학으로 진로를 결정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지난해 연말 우리 집 인싸인 둘째는 크리스마스에도 간호사일로 바쁠 시간임에도  눈길을 뚫고 우리 집으로 달려온 메이한테 메이가 직접 뜨개질한 꿀벌 모양 인형 선물을 받았고, 둘째는 직접 만든 마카롱과 티라미수를 메이에게 선물해 주면서 서로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마치 어린아이들이 서로 산타클로스 선물을 받은 것처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친구라는 것이 나이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메이를 시작으로 덕분에 에드먼튼을 한 바퀴 돌면서 티라미수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직접 배송해준 곳이 여러 곳인데 절반은 나이가 많은 언니 오빠들이다. 눈길이라서 혼자 운전하기가 겁난다고 아빠 찬스를 사용하는 바람에 따라갔다가 친구들 얼굴을 직접 보게 되었는데 그것도 즐거운 경험이 되었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그리워질 때가 많다. H는 내가 한국에 있을 때에 왕래가 많았던 친구다. 그 친구가 가구점을 할 때 아내가 신혼살림에 들어가는 혼수 가구를 일절 구입했었고, 핸드폰 대리점을 할 때에는 내 전화는 물론 친지들과 직장 동료들에게도 핸드폰 구입을 권유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좋은 계약조건에 지인들이 많이들 호응을 해주어서 그 친구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었다. 그 녀석은 다른 친구들에게는 무척이나 사업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다지 환영받는 친구가 아니었다. 내가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다고 해도 다른 친구들과도 그런 정도의 도움을 주고받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친구들에게 인색한 녀석이 나에게만은 베푸는 정이 무척이나 많게 느껴진다.

내가 캐나다로 이민을 하고 난 후 아버지께서 암수술을 받으셨을 때에도 침대에서 움직이기 어려운 사정을 알고 에어매트를 가지고 오기도 하고 몇 차례나 병원을 다녀갔었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께서 혼자되시고 나서도 운전을 해서 2시간 정도 걸리는 누님 댁에 올 때마다 과일 상자와 봉투에 용돈도 준비해서 전해주고 갈 때가 종종 있었다. 내가 한국을 방문할 때에는 몇 시간도 마다하지 않고 공항까지도 달려오고, 가 좋아하는 회를 기본으로 시작해서 삼겹살에 소주는 기본으로 몇 번씩 보장해주는,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런 친구다. 지난 설에도 그 친구가 다녀갔다는 소식을 누님한테서 전해 듣고 H에게 문자로 대신 인사를 보냈다. 코로나 상황에 먼길까지 다녀갔냐고, 멀리 있는 아들 녀석보다 가끔씩 방문해주는 아들 친구가 더 고맙다고 하신다고, 이왕이면 다음에는 용돈도 좀 더 넣어 드려라 농담도 하면서 말이다. 고마운 친구다!


가끔 인터넷으로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그리움과 아쉬움을 달래 보고 사진이나 영상으로 짧은 교류를 주고받는 것이 전부이지만 그 시간이 기다려진다. 이가 안 좋을 때에는 치과 원장에게 연락해서 물어보고 은행 관련된 것은 지점장에게 물어보고 급할 때 대리로 조의금이나 축의금도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한다. 그런 친구가 우리 세대한테 맞는 벗이고 동무일 것이다.

우리 세대에는 한 살이라도 많으면 선배이고 형이었다. 지금 같은 시대에 캐나다의 젊은 세대에게는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을지 모른다. 나이를 초월해서 친구를 사귀라고 하면 나 같은 세대 특히나 한국문화를 몸에 담고 사는 우리네한테는 쉽지 않을 숙제가 될 것 같다.

보고 싶다. 친구들아!

작가의 이전글 학교 공부로만 대학 갈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