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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의 Konadian Life Apr 12. 2021

세상은 넓고도

참 좁다.

인생=인연









잠시 3년 전으로 돌아가 기억을 정리해본다.


리는 우리 집 둘째 아이의 친구다. 둘째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Grade 9부터 MMM Catholic High School에서 배드민턴 팀 멤버로 활동하면서 자주 이름을 듣고 있던 친구였다. 리는 딸아이보다 나이는 한 살이 위였는데, 리 아빠의 직장에 근무지 발령으로 중국에서 몇 년 살다가 중학생 때한국으로  들어가서 잠깐 지낸 후 캐나다로 다시 이민을 서 한 학년을 낮춰 학교를 다녀서 우리 집 둘째와 같은 학년을 다닌 친구사이다.

막연하게 중국에서 살다가 왔다는 말만 듣고 특별하게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우리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있던 준이라는 학생이 리와 친하게 지내면서 여름방학 동안에 준이 용돈도 벌 겸 경험 삼아 리의 아빠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숙식을 하며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의 친구네 집이고, 한국인이라는 것만으로는 집에서 거리도 좀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리의 부모님이 어떤 분들인지 모르기도 해서, 지인의 아들을 두 달 가까이 보내 놓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리의 부모님께 미리 전화로 연락을 해놓고 리의 부모님이 운영하고 있는 주유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방학 전 공휴일인 5월 넷째 월요일 빅토리아 데이를 낀 연휴에 아내와 함께 밴프로 캠핑을 다녀오는 길에 마침 준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캘거리에서 에드먼튼으로 올라오는 1번 고속도로 옆길로 차를 돌려 리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가 있는 시골로 향했다. 

리의 부모님은 에드먼튼에서 차로 한 시간 삼십 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주유소와 편의점 그리고 주류판매점까지 운영을 하고 있었다. Provincial Park으로 지정된 Buck Lake 근처 시골 마을은 정말 한적한 동네였다. 도착해서 리의 부모님과 인사를 나누면서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과 떨어져서 리가 혼자 에드먼튼에서 학교를 다니는데, 간혹 주말에 리가 부모님을 위해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 가게로 운반해주기도 하는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부모 말씀에 잘 따르면서 가게일까지 도와주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고 아들을 정말로 잘 키우셨다는 덕담으로 대화를 시작해서 리 아빠의 안내로 가게 뒤쪽에 집과 주변 장소를 구경했다. Buck Lake는 앨버타 주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라서 호수 주변에 캠핑을 할 수 있는 파킹장도 몇 군데가 자리하고 있어서 낚시나 보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리의 부모님은 캐나다에 2007년에 이민해서 2015년부터는 이곳으로 들어와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많은 한국인들이 캐나다에 이민을 해서 시작하는 사업체의 규모는 크게는 Hotel이나 Motel 그리고 Gas station(주유소)부터 작게는 Convenience store(편의점)나 Coin Laundry(세탁소) Liquor store(주류 판매점)등이 대다수다.


리의 부모님은 사업체를 알아보다가 시골에 위치한 주유소를 운영하기 위해 고등학생이 된 리는 에드먼튼에서 학교 생활을 하도록 하고 주중에 리의 엄마가 한두 번씩 에드먼튼 집에 와서 리가 먹을 음식을 준비해주고 시골 가게로 내려가는 주말가족 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많은 이민 가정이 사업을 위해서 가족들이 떨어져서 생활하는 경우가 있다. 가게는 리의 엄마와 직원이 마무리하고 그동안 리와 준은 둘이서 이것저것 상차림을 해놓고 삼겹살에 저녁식사를 준비해 놓았다. 이런 것이 바로 이민자의 생활이다. 장사를 하면서 가족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저녁 식사자리에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리의 아빠는 중국에 L그룹의 지사 발령으로 구미에서 근무를 하다가 중국의 남쪽, 대만의 바로 위쪽에 위치한 푸젠(福建省) 푸저(福州)라는 곳에서 몇 년 동안 근무를 했고, 그곳직장생활과 한국 기업체 주재원들과친목모임을 하면서 현지에서 경험했던 이런저런 상황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푸저우라는 곳은 나에게도 낯설지 않은 곳이다. 직장 생활을 하던 중에 중국 현지 공장으로 출장을 몇 번 다녀온 곳이기도 해서 반가운 마음에 내가 근무했던 업체의 이름을 이야기하니 바로 나의 전 직장 현지 공장의 담당자 이름을 말하면서 아파트도 같은 라인에서 살았었다며 반가워했다. 과거에 내가 채용면접을 진행하고 해외공장 발령 인사명령을 냈던 바로 그 후배 이름이었다. 반가웠다. 나도 푸저우에 출장을 다녀오며 있었던 이런저런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공통의 소재거리로 옛일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이 만나서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세상에 이럴 수도 있냐면서 서로 놀란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세상이 참 넓지만 이렇게 좁을 수도 있는 것이다. 리의 아빠와 나는 크게 웃으며 이렇게 서로 잘 모르는 사이에서도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아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니 살면서 절대로 나쁜 짓을 하면 안 되겠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 요즘의 미투나 학교폭력 폭로 사태를 보면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남에게 나쁜 짓을 하거나 해를 끼치거나 하는 경우 그것으로 일이 끝나지 않고 언제가 되었든 어디선가 그에 상응하는 것을 돌려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 인연이 새롭게 이어지 이야기꽃을 피웠던 녁식사가 끝나고 새로운 땅에서의 도전에 대한 경험을 나누다 보니 시간이 꽤 많이 늦어졌다. 리의 부모님은 내가 운전해야 할 길이 초행길이고, 가로등이 없는 시골길을 야간에 운전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으니 리의 부모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 밝은 시간에 출발할 것을 권했다. 나도 가족들과 함께 트레일러까지 달고 시골길을 야간에 운전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해서 리 부모님의 따뜻한 배려에 감사함을 표하고 부득이하게 하룻밤 신세까지 지고 다음날 돌아왔다. 물론 여름방학 2달 동안 준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그곳에 맡기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집에 도착해서 오랜만에 전 직장에 남아 있는 후임자에게 카톡을 보냈다. 내가 퇴사한 후 일 년에 한두 번이나마 유일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이다. 보내자마자 바로 보이스톡이 울린다. 나와 함께 근무했을 때에는 일반 사원이었는데, 황 대리가 되었고 어느새 황 과장이 되어 있다. 많이 반갑다.  해전에는 황 과장의 큰아이가 우리 집에 와서 여름방학을 보내고 간 적이 있다. 부모들의 마음은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내 아이가 새로운 환경을 체험하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 달간 우리 집에 중학생 아들을 보냈던 황 과장의 마음을 백번 이해한다. 더구나 황 과장의 아들은 엄마나 아빠 손에 등 떠밀려 온 것이 아니고 본인이 교과서에 나온 캐나다 그것도 여름마다 우리 가족이 단골로 찾아가는 밴프에 있는 모레인 레이크 사진을 보고 직접 보고 싶다는 말을 해서 다녀 간 경우라서 그 짧은 시간의 경험이 더 오랜 시간 기억에 남아 있을 거라 믿는다.

황 과장이 이런저런 회사 이야기를 해준다. 매출은 내가 퇴사할 때보다 두배 가까이 올랐단다. 벌써 퇴사한 지 10년 이상이 지났으니 매출이나 규모가 더 커진 것이 당연할 것이다. 업종이 특수한 회사라서 국내와 해외시장의 상황은 크게 작용하지 않고 꾸준하게 성장을 하는 기업이다. 물론 기술개발과 연구비용에 지속적인 투자를 하며 시장을 선도하기 때문에 성장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전량 일본에서 수입하던 제품을 국산으로 개발해서 생산하고 거기에 하나 더 신제품 개발까지 앞서는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황 과장은 여전히 직장이 정말 들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이 망할 놈의 카톡을 없애 버리면 좋겠다는 말도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업무지시가 휴일도 없다는 불평이다. 그래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 역할과 인사팀 역할까지 잘 해내는 것을 보면 정말 팀장이 될만하다고 칭찬을 했더니 나와 함께 일할 때가 제일 좋은 호시절이었단다. 듣기 좋으란 말인 줄 알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

중국에 있는 후배의 안부를 묻자 "이 OO 차장요?" 한다. 장이란다. 다들 퇴사할 때 나의 직급보다 높아졌다. 입사동기들이 부장 말년이거나 이사를 달고 있단다. 중국 상해로 나간 동기, 유럽지사로 나간 후배, 멕시코 지사로 발령을 받아 나간 동기 이야기를 해준다. 직장이라는 곳은 내가 몸담고 일하는 동안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며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라 생각했었다. 내가 어렵사리 퇴사를 결정할 때에는 나의 건강이 첫 번째 문제였고, 다음이 불필요한 구조조정으로 조직 상부 구성원에 대한 더 이상의 기대가 없어졌고, 그런 내부 조직의 불합리한 환경에서 나의  발전이 긍정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컸기에 사직을 했었다. 그리고 내가 퇴사할 당시 전 직장 동료들과의 인연은 그때 그렇게 끝나고 모든 것이 정리될 것으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막상 사직서를 쓰고 조직을 떠난 다음에도 한동안 전 직장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남은 것처럼 후유증을 앓기도 했던 것 같다. 전 직장의 상사였던 상무이사가 나에게 재입사를 추천했을 때에 잠시 갈등을 했었지만 내가 등진 사람과 다시 일하는 것은 나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접었었다. 그 후 개인사업을 시작하고 나서도 일 년여 기간을 마음이 조금 흔들린 경험을 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과거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저 옛날이야기로 간주하고 그 많은 인연들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살아왔었다. 그런데 그동안 자주 연락하지 않아서 모르고 있던 사람들의 소식을 전해듣고, 나의 과거와 이어진 여러 가지 인연이 그리 약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직 중국에 근무 중인 후배인 이 차장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통화를 끝냈다.




며칠이 지나고 모르는 번호가 뜨면서 벨이 울렸다. 스팸 전화이거 지역 커뮤니티에서 홍보하는 전화려니 하고 무시해버렸다. 잠시 후 다시 벨이 울린다.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아직도 어색한 "헬로"라는 말로 대응을 하자 상대편에서 "여보세요"가 나온다. 난데없이 한국말이 들려와서 순간적으로 누굴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대답을 했다. 중국이란다. 중국에 있는 후배다. "아이고 선배님!" 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차다. 황과장이 안부를 전하며 내 연락처를 주었다고 한다. 나의 전 직장은 90년대 중반에 중국에 현지 공장을 몇 군데 세우며 중국어 전공자를 채용했었다. 그중에 두 번째 차수에 모집한 신입사원 중 한 명이 바로 이 차장이었다. 비록 체구는 작지만 업무능력과 대인관계가 뛰어난 꽤나 단단한 사람이다. 그는 아직도 중국에서 근무 중이며 현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요원이 되어 있었다. 대기업에서는 해외 주재원은 연차를 채우면 인사이동을 시키는 것이 기본이지만 중견기업에서는 인력 충원도 쉽지 않고, 전문 인력을 채워 놓고서 문제가 없을 경우엔 해당 인력을 지속적으로 현지에 유지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중견기업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 후배는 내가 갑자기 퇴사한 것을 단순히 건강 상태가 안 좋아서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조직 내부의 복잡한 문제를 알리가 없을 것이다. 당시 바쁘게 지내면서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져서 무척 아쉬웠다고 하면서 이렇게 다시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반갑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다.


중국에 있는 동안 아이들은 성장해서 셋 중에 큰아이는 홍콩대학에 진학했고 둘째는 한국 연세대학교에 진학했고 중국에서는 늦둥이 막내만 데리고 있어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산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한다. 나도 그동안 캐나다에서 사는 이야기를 좀 해주고 리의 아빠를 이야기하며 물었다. 선배님이 그 친구를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을 한다. 며칠 전 이곳에서 만난 이야기를 주었다. 후배도 놀랍다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냐며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다며 정말 좋아했다. 인연일 것이다. 내가 전 직장에서 후배를 만나고, 그 후배와 관련된 중국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람을 이렇게 수천키로가 떨어진  캐나다에서 만날 수 있다것이 쉽지 않은 인연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그 후배와 전화로 한참을 통화하면서 예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중 그 후배가 나에게 "회사에서 만난 사람 중에 손에 꼽는 존경하는 선배님"이라는 말을 했다. 후배는 내가 인사노무팀을 이끌면서 후배들에게 대학과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고 회사의 지원책을 챙겨 준 이야기를 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성장하려는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물론 나와 다르게 오랜 시간 회사라는 조직에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후배를 살갑게 대해준 것도 아니었고, 직접 업무적으로 큰 도움을 준 것도 없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이제 조직을 떠나 10년 이상 지나서 서로의 인간적인 관계를 제외한다면 아무런 득실을 따질 일이 없는 사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나에게 과분한 '존경'을 표현해주는 후배가 고마웠다.

아직도 조직생활을 하고 있는 후배들이 참 대단해 보인다. 나는 십 년 조금 넘게 회사를 다닌 후 개인사업으로 잠시 시간을 보냈고 머나먼 캐나다까지 들어와서 살고 있지만, 아직도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에 남아 있는 친구들을 보면 지구력이 엄청난 사람들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면서 후배에게 리 아빠의 연락처를 전해주었다.




다시 며칠이 지나고 리의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중국에 후배 이 차장이 리의 아빠에게 전화를 해서 한참 동안 통화를 했다며 그동안 연락이 안 된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고 서로가 소식을 알게 되어서 정말 반가웠다고 한다. 그리고 하는 한마디가 이 차장이 나를 가장 존경하는 선배님이라고 했다고 한다. 존경하는 선배라! 글쎄다. 막상 내가 후배와 통화를 할 때에는 인사치레로 들었던 것도 있었지만 리 아빠에게까지 나에게 '존경'을 표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느낌이 달랐던 것 같다.

나는 해가 바뀌고 새해가 되면 새해인사를 받기보다 내가 먼저 인사를 하는 사람이라서 가끔은 내가 인생을 제대로 못살았나 하는 의구심이 생길 때도 있다. 단순한 예로 학교 선후배들과 친구들, 그리고 과거 직장의 동료들에게도 내가 먼저 인사하는 사람이지 먼저 인사받는 경험이 없었듯이 누가 나에게 존경한다는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다. 그나마 어렵사리 이어진 인연으로 중국에 있는 후배를 새롭게 만나서 존경한다는 말도 들어본 것 같다. 내가 후배인 이 차장과 통화 중에 남긴 마지막 인사를 적어본다.

"이 차장님! 반가웠어요. 고맙습니다!"




3년 전 이야기를 적어보면서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그 이후로도 후배는 명절이나 새해가 될 때마다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지난해에는 팬데믹으로 중국에서의 생활이 힘들었는지 자주 연락을 해왔다. 현지에서 사진을 찍어서 보내기도 하고 큰아이가 교환학생으로 홍콩대학에서 서울대학으로 옮겨 갔다는  가족들 일상을 전해 주기도 한다. 리의 부모님은 에드먼튼으로 장을 보러 나올 때 만나서 커피라도 한잔 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강한 인연의 힘을 느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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