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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Jul 08. 2021

가파도 가는 길

가파도.

예전부터 유난히 가고 싶던 곳이었다.


제주를 가볼 만큼 다 가봤다고 느꼈을 때, 우연히 저 멀리쯤 가파도가 보이는 카페에 머무르게 됐는데, 그 카페 주인이 추천해주었다. 가파도에 가 보았느냐고, 꽤 좋다고. 단지, 들어갈 수 있는 날이 아주 많지는 않으므로 꼭 문의하고 가라고. 당시 함께 제주를 여행하던 후배와 남은 여행 기간 동안 매일 문의했지만, 가파도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었다.



이번엔 남자친구와 가파도에 꼭 가보고 싶었다. 가파도에 대해 아는 건 하나뿐이었다. 섬 전체가 평지라는 사실. 마라도와 가깝다는 (별 도움 안 되는) 사실도. 마라도는 이미 가 본 적이 있었다. 입사 이후부터 퇴사 이후엔 더더욱 싫어하게 되었던 예전 회사의 워크숍으로. 덕분에 별로 재밌던 기억은 아니었다.


남자친구와는 전날 밤에 정했다. 내일 아침엔 가파도에 가자고.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선 선착장에 전화도 안 해보고 (날이 너무도 심하게 좋았으므로) 바로 선착장으로 갔다. 티켓을 끊는데 아주 놀라운 공지사항을 전해 들었다. 오늘 가파도에 들어가는 배는 1시 배뿐이고, 나오는 배도 2시 20분 배뿐이라고. 해상 용어를 까먹었지만 그것 때문에 바다 상황이 좋지가 않다고. 우리가 느끼는 육지의 날씨와 바다의 컨디션은 꼭 동일하지는 않은가 보다. 들어가도 1시간밖에 둘러보지 못한다니, 가지 말까 싶었지만 언제나 의욕적인 내 애인은 그래도 왔으니 다녀오자고 했다. 그러자 하고 모든 계획을 변경했다. 당시 시각은 11시 30분쯤이었다. 원래는 가파도에 들어가서 섬 구경도 하고, 밥도 먹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도 가고 그럴 생각이었지만. 선착장 근처에서 밥을 먹고 들어가야 했다. 가파도에 들어가서는 1시간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빠르게 n사 지도 어플을 켜고 별점을 보며 선착장 근처의 맛집을 찾았다. 우리는 딱히 당기는 게 없었으므로, 맛집으로 보이는 2-3군데 중에서 선택할 생각이었다. 초밥! 며칠 전부터 초밥 먹을까 생각했었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이 근처에 맛집이라고 평가된 곳은 제주도답게 생선구이나 조림집이 많았고, 우린 며칠 동안 생선구이를 여러 번 먹었다. 더 먹으면 물릴 것 같았다. 별점이 높은 초밥집은 당시 상황에선 꽤나 괜찮은 선택이었다.


분명 초밥집이 선착장에서 멀지 않았는데, 걸어가면서 그곳이 존재할 거라는 확신이 적어졌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선구이집들이 줄줄이 늘어선 곳을 지나…. 코너를 약간 돌면, 가정집이 나올 것 같았다. 남자친구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혹시 그새에 망했나?”라고 했다. 코로나로 인해 지난 1년 동안 많은 식당과 카페와 노래방과 피시방들은 문을 닫았다. 평점이 최근 한 달 내에 등록된 것이었어도, 바로 지난주부터 영업을 마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코너를 돌자, 너무 초밥집같이 생기지 않은 초밥집이 나타났다. 놀랍고 반가웠다. 점심 먹을만한 마땅한 곳을 다시 찾지 않아도 되니까. 겉에서 보기에는 맛집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환기가 잘 안된 듯한 음식 냄새가 나서 기대감이 확 줄어들었다.


전채요리가 나왔다. 나와 애인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간장게장, 내가 못 먹는 연어샐러드, 좋아해 마지않는 알탕이 돌솥에 나왔다. 알탕이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애인은 간장게장도 맛있다고 먹어보라고 했다. 빈속에 비릿한 음식이 들어가면 속이 안 좋을 것 같아 초밥을 한 점이라도 먹고 먹어보겠다고 했지만, 별로 기대하진 않았다. 간장게장은…. 아무래도 별로였다.


초밥이 나왔는데 우선 비주얼이 훌륭했다. 그리고 내가 먹지 않는 연어보다 새우가 다양한 종류별로 많은 점도 좋았고, 아무거나 한 점 먹었을 때 굉장히 맛있었다. 너무 정통 느낌으로 무겁지 않으면서 요즘 젊은 사람들의 입맛을 영민하게 잘 공략했다는 느낌이었다. 애인이 권한 간장게장도 한 입 베어 물었다. 어? 기분 좋은 단맛과 잘 손질된 게가 기분이나 맛을 전혀 거스르지 않았다. 간장게장 싫어하는 나도 꽤나 먹을만한 맛이었다. 애인은 심지어 가족들에게 택배로도 보냈다. (간장게장에 자부심이 있는 집이었는지, 택배서비스를 했다.) 초밥은 한 개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다 맛있었다. 수줍어 보이는 셰프님께 맛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손님이 많지 않았다.) 기분이 좋으셨는지 광어 튀김을 서비스로 주셨는데, 이것도 뭐… 메뉴로 있으면 사 먹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 입에서 살살 녹았다.


가파도 들어가기 전부터 이렇게   식사로 충만해지는 기분이라니. 역시 여행을 오면 쉽게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인생에서 좋은 순간은 이렇게 예고 없이 오곤 한다.




(얘기가 너무 길어져서, 가파도에 입도한 얘기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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