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션 끌어올려~~
작년 한 해는 예능대세 기안 84의 해였다. 논란의 중심에 서며 호불호가 갈렸지만 필터링 없는 날것의 매력으로 털털하게 다가와준 그님. 가끔 혐오스러운 모습도 비추지만 그만의 삶의 방식이라 넉끈히 존중하며 귀엽게 보아 넘긴다. 별명은 '태어난 김에 사는 남자'
우리 집에도 ’ 태어난 김에 사는 여자 기안 84님‘이 계신다.
현관문이 열리자 "텐션 끌어올려 우~~" 도레미파솔~~~ 솔톤에 조용했던 집안이 갑작스레 들썩 거린다. 딸아이가 간만에 방문하니 나도 좋아 덩달아 추임새를 넣어본다. "텐션 끌어올려 우~~" 옆지기는 또 시작됐다고 에둘러 핀잔을 준다.
연말에 3일을 묵고 갔다. 옆지기는 딸아이만 오면 정신이 혼미하다고 집안이 조용하려면 제발 곁장구를 쳐주지 말라고 신신 당부한다. 그러기엔 내가 말썽이다. 딸아이를 보면 미리감치 텐션 업이 되니 주체할 수 없는 엔돌핀상승을 억제할 여력이 없다.
그녀의 주특기는 '엄마를 깜놀 시키는 것'
MZ세대 대표주자며 여자 기안 84를 자처하는 엉뚱한 매력의 그녀. 하늘을 찌르는 엉뚱함은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바퀴 달린 카트 안에 큰 쇼핑백 2개가 덩그러니 실려있다. 오자마자 엄마아빠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쇼핑백을 풀어헤친다. 헤치는 순간 새 옷에서 나는 석유냄새가 진동을 하며 '어? 이거 아닌데..' 하는 불길한 생각마저 든다. 뽀글이 소재의 베이지 롱코트는 척 보기에도 5~60대가 입기엔 무리가 있다.
"엄마, 인터넷서 내 거 사면서 엄마 아빠 것도 샀어." 해맑게 웃는 그녀. 마음은 천사표다.
'헐~엄마 것만 사지 아빠 것까지?' 혼자서 중얼거려 본다.
내 기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들이다. 바지 앞뒤 구분 없이 입고 필라테스 가기, 색깔 구분 없이 구멍 난 덧신 마구 신어대기, 적당히 이쁜데 많이 이쁜척하기, 십 분에 마칠 설거지 1~2분 안에 후다닥 해치우기, 마음이 동하면 모르는 누구나 따라가 모임 참석하기 등
얼마 전 급하게 전화가 왔다. 회사 선배님이 55인치 삼성 TV를 무료로 나눔 한다고, 생각 있으면 당장 결정하라고. 집에 있는 TV는 연식이 오래되어 교체할 생각이 있었던지라 제조사와 연식을 재차 물었다. 2~3년 사용했다는 말과 그녀 있는 숙소까지 배달해 주신다는 황송한 말씀까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웬 떡인가 싶어 흔쾌히 승낙을 하고 그녀의 들뜬 목소리가 잠잠해짐을 느꼈다. 바쁜 업무 중에도 엄마를 생각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웬 떡은 웬 떡'이 아니었다. 역시나 그녀는 엄마의 믿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들어도 생소한 한성 TV, 그마저도 한쪽 모서리가 액정과 함께 깨져 있었다. 결국 한성 TV는 거실에 우두커니 7일을 서있다 조용히 재활용센터로 보내졌다. '욱'하고 분노가 치올랐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마음씀에 '쑥'으로 분노조절을 했다. 그녀에게 잔소리나 참견을 하면 정색을 하고 싫어하니 나도 참는 날들이 많다. 참견 하나에 하루씩 명줄이 줄어드니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난 소중한 엄마니까.'
이런 그녀에게 묘한 매력과 배울 점이 꽤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바로 행동에 옮기는 직진녀"
불도저 같은 추진력이 그녀의 가장 큰 강점이다. 웬만한 일에 망설임 없고 바로바로가 그녀의 트렌드 마크다. 그런 반면 난 매사에 심사숙고. 시작도 못하고 놓치는 일이 태반이니 가끔은 그녀를 어중간하게 따라 해 본다.
주저함 없는 청춘들이 보기 좋고 어깨도 두드려 주고 싶다. '힘내라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뭘 망설이냐고' 먹을 것도, 가볼 곳도, 경험할 것도 도처에 널려 있는데 뭘 주저하냐고' 씩씩하게, 당당하게 나아가 호기심 가득한 세상, 달콤 쌉싸름 신기방기한 세상 마음껏 요리하며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년에 작고하신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 유언처럼 한마디 '툭' 던지셨다.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어. 인생 뭐 있나? 별거 없다..." 하셨다. 지지부진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지 못하는 자식이 안타까워 하시는 말씀 같아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여자, 그녀가 오늘따라 넉넉히 부러울 따름이다.
순수하고 가식 없고 인간미 넘치는 그녀의 모습은 분명 매력적이다. 그러나 가끔은, 아니 조금 자주는 부모가 감당하기 벅찰 때가 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건 좋으나 위험한 경험을 할 때면 노심초사 걱정부터 앞선다. 부모 마음도 조금 생각해 주면 좋으련만.
'저기요... 올해는 텐션 조금만 내려 주시는 걸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