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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Feb 01. 2024

오늘도 옆지기는 토라졌다.

갱년기 남성을 대하는 법




발목인대 봉합술로 깁스를 한 지 6주가 넘어간다. 외출을 자제하니 나의 일거리는 모두 옆지기 몫이다. 손발이 되어주지 않으면 3배의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제일 많은 도움을 요청하는 건 세탁기 돌리기, 도서관 책 빌리기, 장보기등이다. 도움을 청하며 그럭저럭 잘도 버텨왔는데 이번주 '장보기 미션'으로 6주간의 아슬아슬한 곡예는 끝장을 보고야 말았다.




“틀니오빠야~~~(종종 놀려줄 때 쓰는 애칭)

 올 때 마트서 냉동큐브닭가슴살 1000g, 바나나 한송이 부탁해요”

부연 설명도 함께 했다. 꼭 안심닭가슴살 말고 냉동큐브닭가슴살로 사 오라고. 

"ㅇㅋ" 바로 회신이 왔다. 역시 옆지기의 사랑은 지체 없는 회신에 있다고 득심(得心)하고 있었다.




활동이 없고 앉아만 있으니 몸이 알아서 든든한 뱃살을 두세 겹 만들어 주었다. 이참에 평생 다짐하고 또 다짐만 하는 다이어트를 소환해 보았다.




댄서인 아들은 저탄고지 식단으로 뼈만 앙상한 몸매를 수년째 유지하고 있다. 닭가슴살이 세끼 식사다.

“아들아! 입에서 닭냄새 안 나?” “아니” 

“그래? 엄마도 한번 해볼까?” “해봐 안 되는 건 없어...”

초긍정 확신에 찬 답변이 돌아왔다. 그 길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옆지기에게 바로 톡을 보냈다.

'장보기 미션  큐브닭가슴살 사 오기.'






안경에 김서림을 한가득 앉고 해맑게 웃으며 퇴근한 옆지기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저녁상을 기다린다. 장바구니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내가 원했던 품목이 아니다.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짜증이 올라왔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그새를 못 참고 볼멘소리로 “자기야, 내가 그렇게 냉동큐브로 사 오라고 했잖아. 항상 그 모양이야” 퉁명스럽고 직설적인 한마디에  옆지기는 싸늘한 얼음골 왕자가 되었다. 잠시 주춤하더니 그만의 특유한 표정으로 토라짐을 신랄하게 표현했다. 그가 수저를 내려놓는 순간 '아차'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달래는데 5분, 사과하는데 10분. 총 15분이 소요되고 나서야 식어버린 마음과 표정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예순을 넘기면서 예전에 없던 감정들로 나를 종종 당황하게 만든다. 시도 때도 없이 삐지기, 말 안 듣고 무조건 우기기, 우왕좌왕 물건 잊고 다니기, 아들한테 집착하기, 멍하니 먼산 바라보기, 금세라도 건드리면 울 것 같은 먹먹한 시선 보내기. 툭하면 화부터 내는 성격에 마음 상하기 일쑤였는데 그것마저도 갖다 버렸나 이젠 매사가 잠잠하다. 나도 갱년기, 옆지기도 갱년기. 족히 5년은 넘은 듯하다. 아직도 진행 중인데 언제 서야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려나?






남자나 여자나  갱년기 원인은 호르몬 변화다. 남자는 테스토스토론(남성 호르몬)이, 여자는 에스트로겐(여성호르몬)이 크게 줄어 각종 갱년기 증상이 나타난다. 피로감, 우울감, 근력 저하, 탈모, 뱃살, 불면증, 안면홍조등이 주 증상이다. 갱년기는 신체적 증상도 두드러지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리는 감정변화도 한몫한다. 내가 나 자신을 통제하기도 힘든데 나를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은 어떠하랴? 




옆지기는 요즘 들어 부쩍 짜증이 많아지고 사소한 일에도 화를 잘 내고, 심하게 삐지기를 반복한다. 성격이 변했는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헷갈릴 정도다. 감정조절에 심한 어려움을 겪는 지인은 산부인과에서 약을 처방받는다. 옆지기도 약을 처방받아야 되나 고민 중이다. 다행인 건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눈물짓는 중년들도 많은데 아직까지 이유 없는 눈물로 나를  당황하게 한 적은 없다.




갱년기는 단순한 노화가 아닌 일종의 만성질환이다.

힘든 고비를 함께 넘기는 부부라 생각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해 주면 좋으련만 실천이 어렵다. 자주 또는 가끔 성냥불에 불을 붙이듯 성나게 달아오를 데가 있다. 남편들도 이제는 '강한 남자'신드롬에서 비껴 나 자존심 내려놓고 아내에게 자연스럽게 어깨를 내어 주어도 좋다. 동병상련(同病相憐) 나를 알고 너를 아는데 갱년기 증상쯤이야 거뜬히 극복하지 않을까 싶다.







눈치 없고 무신경한 옆지기도 불면증에 온갖 갱년기 증상을 두루 섭렵하는 나를 배려하려 애쓴다. 여성들은 노골적으로 갱년기 증상을 표출한다. 사회도 중년 여성의 갱년기 증후군 거들기에 한몫한다. 하지만 남성들은 갱년기에 대한 이해도 낮고 표현도 서투니 모르고 지나치며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시기에 갱년기가 쓰나미처럼 밀려왔으나 나는 내 고통에 함몰되어 옆지기의 아픔은 신경 쓰지도 못했다. ‘그의 이야기를, 그의 고통을 알아주고 공감만 해주었어도 좋았을걸...’  




큐브닭가슴살 사건은 그이의 가느다란 삐짐으로 무던하게 넘어갔다. 예전 같으면 큰소리가 오갔을 사건이다.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 감소가 가정에 평화를 가져다 준셈이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크게 어긋나는 게 아니면 눈감아주는 센스도 필요하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우리 부부만의 환상의 케미가 있다는 것.

일주일에 한 번 몰아서 하는 대청소와 맛있는 음식 먹으며 힐링할 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서로를 인정한다. 음식점 투어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의 접시 위에 음식을 고스란히 얹어주며 달달한 부부의 모습을 연출한다. 이럴 때만 사랑이 샘솟는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갱년기는 잠시 물렀거라다.




세상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호흡.

30년 이상을 함께한 동지에 대한 의리 같은 것이다.

힘들고 미워지고 원망스러워질 때 환상의 케미를 생각한다. 종종.

그럼 다시 평온한 바닷속으로  나를 데려다 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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