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쁘게 말하는 어른이
“엄마 이제 제발!!!
나한테 전화 좀 하지 마.”
치매에 걸린 엄마는 불안이 밀려올 때면 하루에도 몇 번씩 딸들에게 수화기를 드신다. 엄마는 S녀의 매몰찬 한마디에 가슴이 영영 얼어붙었다. 그녀의 기운으론 도저히 뽑을 수 없는 두꺼운 화살이 가슴을 명중했다. 말 한마디가 그녀의 뽀얗고 따스한 심장을 가차 없이 뭉개 버렸다. 그녀는 자식들에 대한 좋은 기억만 가득 싣고 치매의 강을 건너다 돌이킬 수 없는 마음에 상처만 앉고 주저앉아 버렸다.. 그 이후로 수화기를 들지 못하신다.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고 혀는 신체를 베는 칼이다.”(풍도)
말에는 동전의 이중성이 있다.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며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힘이 있다. 무서우면서도 커다란 힘을 지녔으니 상대방에게 건넬 때는 꼭꼭 씹어 정성껏 주어야 한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꽃향기로 누군가에겐 칼날로 전달될 수 있다. 누군가는 말 때문에 속상해하고, 누군가는 말 덕분에 희망을 얻는다. 그래서 말은 곧 인격이며 사람을 돋보이게도, 추락하게도 한다.
세상에 난무하는 무수히 많은 말들. 상대방과 나의 마음을 어떨 때는 뜨겁게, 어떨 때는 차갑게 연결해 주는 가교역할을 한다. 마음에서 올라와 입을 통해 세상밖으로 나가는 순간 저마다의 온도로 상대방에게 전달된다. 다정한 말, 힘이 되는 말, 칭찬의 말, 두고두고 듣고 싶은 말에는 따스함이. 비난의 말, 경멸의 말, 차갑게 톡 쏘아붙이는 말, 고통의 말에는 차가움이 묻어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 잘 다듬어서 골라 써야만 보석 같은 언어가 될 수 있다.
살다 보면 나와 상대방의 말로인해 상처 주고 상처받은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도 모르게 그의 심장에 쏘아 버렸을 모진 말들. 상대방의 사소한 말로 인해 후벼 파였던 나의 가슴. 우리는 저마다 말빚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말로 지은 업은 지울 수도 없다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말로 지은 빚은 부드럽고 상냥한 말로 꼬인 실타래를 다시 풀어낼 수 있다.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끙끙거리다 진실을 외면한 기억들이 얼마나 많은가? 되갚는 말 또한 없으면 진실을, 오해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우리를 얽매고 괴롭히는 말도 또다시 말을 이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케케묵은 상처와 응어리도 한순간에 녹여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녀석이 '말'이다.
가장 가까운 사이인 가족 간에도 말로 인한 오해와 아픔의 상처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중과 배려 없는 막말을 쏟아붓다보면 관계의 틈은 무섭게 벌어진다. 벌어진 상처의 틈을 메우려면 두세 배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한때는 가족들의 매몰찬 말에 우울증, 빈둥지증후군까지 겹치면서 나 자신을 한없이 낮은 곳으로 추락시켰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올라올 수 없는 곳까지 떨어뜨렸다. 속세를 떠나 '비구니가 될까?'를 삼여 년 가까이 고민했었다. 아픈 시간들은 시간의 약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치유되었다.
이십여 년 직장생활을 하며 단지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대우받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 아픔이 거칠게 다가왔다. 아이들에게는 그런 아픔을 맛 보이고 싶지 않아 강한 무적의 아이들로 키워내고 싶었다. 말투는 둔탁한 벽돌색에, 사용하는 언어는 남극에 빙하와도 닮았다. 세계 온난화로 남극에 얼음도 녹아내리고 이제 아이들도 성장해 자기 앞가림을 다하니 나도 이제는 내 심장과 내입을 흐물흐물하게 녹여낼 때가 되었다.
"우리 집 엄마가 달라졌어요~ "란 말을 듣고 싶다.
아이들 키우며 직장생활 해나가며 그 힘듦을 차갑고 매몰찬 언어로 포장했었다. 지금도 아이들은 엄마의 차가운 말투가 구석에 남아있는지 서운한 감정을 가끔 끌어올린다. 시간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고 조금 여유가 생긴 지금! 변화하는 환경에 사랑을 듬뿍 담아 따스한 언어로 버무려보고 싶다. 유년기 자녀교육은 강함으로 종지부를 찍고 성년기 자녀교육은 따스함과 부드러움으로 포장하려 한다. 엄마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랑을 부드러운 말에 실어 진실되게 전해주고 싶다.
말을 예쁘게 하려면 말의 내용, 단어, 말투 모두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말투는 상대방이 느끼는 체감온도가 높다. 부드러운 말투는 상대방의 마음을 말랑거리게, 툭툭 내뱉는 직선적인 말투는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쇼호스트 신현종 님은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말투는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어미를 내리는 말'이라 했다.
우리는 누구나 주변사람들과 잘 지내려는 이쁜 마음이 있다.
‘마음이 그게 아닌데’ 하면서 후회하는 말을 하기보다 상대방에게 고운 꽃향기가 퍼져 나갈 수 있는 말센스를 간직하고 싶다. 삶에 지치고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엄마의 따스한 마음을 담은 아주아주 말랑거리는 말을 속삭여주는 연습을 해야겠다. 고운 말 한마디로 각박한 세상살이에 지친 지인들에게 버터 같은 부드러움을 선사하고 싶다.
‘사랑해, 미안해’
마치 네 잎클로버를 건네기라도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