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시 Feb 14. 2024

떡국 한 사발에 우겨버린 앙금들

원망을 소각했다.





"아들은 남의 남편이야"라는데...



남편은 결혼을 하고 30년 가까이 어머니의 아들로 살아오다 예순이 지나 심상의 변화가 생겼는지 나의 애절한 남편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외롭거나 마음이 허해 초개라도 잡는 심정으로 의지할 곳을 찾아 헤맬 때조차 남편은, 남편의 자리는 없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남편의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두니 공허하면서도 알 수 없는 쾌감과 안락함이 묻어났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는 가슴 한복판에 나의 자리를, 아내의 자리를 비좁게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부동산 매매계약을 하면 주인이 바뀌듯 결혼을 하면 어머니에서 배우자로 주인 자리를 내어줌이 현명한 처사다. 그러나 60년을 어머니의 아들로 끊을 수 없는 단단한 매듭을 엮어가신 시어머니. 이젠 본인의 손을 조금 놓아주셔도 좋으련만  팔순이 넘은 연경에도 나에게 양보를 안 하신다. 시어머니는 의미 없는 자식사랑에 끈을 부여잡고 계시고, 남편은 중간에서 중재역할 하느라 동분서주하고, 나는 내 자리를 찾지 못하고 멀찌가니 원망만 복리로 불려가고 있는 지경이다. 사태가 이러니 모두의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진정한 어른은 부모보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 더 집중한다.

결혼을 하고 스스로 가정을 꾸렸다면 배우자와 자식을 먼저 챙기는 것이 우선이다. 부모에게 잘하는 것도 좋지만 행복을 위한 가장 현명한 길은 내가 먼저 잘살고 내가 돌봐야 할 처자식을 보듬는 것이 우선이다. 자신을 키워준 부모라 더 돌봐드리고 싶지만 자신과 가족을 희생하며 부모를 살피다 보면 부모입장에선 좋을지 몰라도 부모로 인해 나와 가족이 힘들어지고 그 원망이 다시 부모에게 향한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충분한 여유가 있다면 성인이 된 후에 부모나 형제를 챙기는 것은 선하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내 가정의 온전한 울타리조차 형성하지 못하고 쓰러져 가는데 어설픈 효행과 챙김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가족이라도 서로에게 지켜야 할 적당한 거리를 두자’가 나의 굳건한 신조다.

강원도 산골서 부모님의 사랑과 보살핌 없이 그저 먹여만 주면 알아서 자랐던 독립심 강한 아이였다.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만 했던 아이는 자라서 '자식에게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시는' 시어머니를 만났다. 그녀는 결혼 30년이 지나 예순을 넘긴 아들의 손을 아직도 이리저리 웅켜잡고 계신다. 성인이 되었다면 아무리 가족이라도 간섭이나 걱정을 붙들어 매시고 무심히 놓아주는 것이 부모의 도리가 아닐까?






엄동설한 새벽 3시에 김장김치를 싣고 퇴근을 했다.

한동안 시어머니는 강원도 횡성에 계신 남동생네서 김장김치를 얻어드셨다. 연말 과중한 업무에 밀려 야근에 움푹 파인 눈꺼풀과 다크서클로 얼굴을 장식하고 있을 때쯤 "당장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고, 오늘 늦게라도 김장김치를 싣고 오라"는 전화를 하셨다. 주말에 천천히 다녀온다는 말도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는 남편은 피곤을 등에 업고 밤 9시에 회사에서 강원도 횡성으로, 다시 서울 본가로, 다시 집으로 꾸역꾸역 김치를 싣고 퇴근을 했다. 그 시간이 새벽 3시쯤이다.




남편이 도착하기까지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강원도 횡성의 외삼촌댁은 밤이면 칠흑 같은 어둠만 존재하는 아주 외진 곳이다. 언덕이 무성한 일차선에 눈이 오고 얼음이라도 끼면 다니는 차들조차 없어 꼼짝없이 멈춰 서야 하는 위험한 길. 그 길을 그 밤에 가야 했다. 극구 말렸지만 언제나 남편은 시어머니가 우선이었기에 별도리가 없었다. 내겐 남편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사고라도 나면 난 더 이상 아무것도 안 할 거니 알아서 해”라고 강하게 말했다. 강한 경고덕에 조심조심 운전을 했나 무사히 도착했다. 이 사건 이후로 어머니도 남편도 나도 더 이상 외삼촌네 김장을 먹지 않는다. 서로가 금기라도 된 듯 말이 없다.




반찬을 해주시며 과한 참견을 하셨던 어머니. 적당한 선을  허들 넘듯 너무나 쉽게 넘어오셨던 어머니. 싫은 내색이라도 하면 “넌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며 일순간에 무시하셨던 어머니. 지켜야 할 적정선을 얘기해도 중간에서 중간자 역할을 허술하게 했던 남편. 시댁문제에 불만이라도 내색하면 '버럭' 소리부터 지르는 남편. 아내보다 늘 어머니가 먼저고 우선이었던 어머니부터 감싸고도는 남편. 어찌해야 하나? 어느 순간 말끔히 포기하기에 이르렇다. 포기도 빠른 현명한 나였다.




그는 마마보이를 가장한 책임회피형 남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응둥이와 사는 여자의 심정을. 한쪽은 자식의 손을 부여잡고 한쪽은 부모의 끈을 놓지 못하는 삼각관계의 묘한 감정을. 녹을 줄도 모르고 쌓여만 가는 가슴속 응어리들이 이내 굳어져 천년 묵은 얼음장처럼 단단해져 갔다. 응석받이와 사는 여자의 심정은 '남편이 외도했을 때의 아픔과 맞먹는다고.' 해결될 수 없는 사건에 너무나 아프고 쓰라렸다. 30년째 싸인 원망의 사슬이 60년은 갈 기세다.








다리부상으로 이번설은 참석을 못했다. 살갑다 데면데면 대한 지 이 년쯤 되어간다. 어머니도 며느리의 싸늘한 기운을 감지하셨는지 예전과 다르게 바리바리 음식을 싸서 아들 편에 보내셨다. 걸쭉한 사골국물 2병에, 아픈 허리를 힘겹게 곧추세우시고 이리저리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시면서 빚었을 어머니표 만두, 굳이 보내주시지 않아도 될 떡국떡까지. 한 박스에 음식다발을 보며 가슴이 메여왔다. 늘 원망스러웠지만 어머니의 자식사랑은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다. 평생을 그리 사신 분을 내가 이해해야 끈질기고 지루한  원망의 끈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저녁에 어머니표 만둣국을 끓여냈다.

진한 사골국물에 담백하고 순수한 맛의 만두, 쫄깃한 떡저름까지. 김가루와 참기름을 듬뿍 넣어 한 그릇을 순삭 했다. 떡국 한 사발에 10년 묵은 상처와 원망들을  삼켜버리는 순간들이었다. 일순간에 쾌쾌이 쌓였던 앙금을 지워버리는 건 무리다. 6할만 삼켜 버렸다. 나머지 4할은 두고두고 아껴서 조금씩 삭혀 버리려 한다. 30년 아파했던 상처를 한순간에 쓰나미처럼 지워버리는 건  나의 아픈 감정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원망이 한 줌의 재로 변하는 순간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법륜스님은 시어머니도 남편도 나도 모두 평범한 보통의 사람이기에 겪을 수 있는 시시콜콜한 인생사 문제라 하신다. 누구나 겪을 수 있고 이 정도면 평균이하의 고부갈등이고 대다수가 겪는 일이라고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아 다행이구나!” 마음 한편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이제 나도 조금 더 성숙하게 나이를 먹나 보다. 만둣국과 함께.       




봄은 동틀 무렵이, 한 여름은 밤이, 가을은 해 질 녘의 정취가, 겨울은 새벽녘이 가장 좋다고 한다. 언제든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좋다 하니 봄의 파릇한 달래맛을, 여름의 시원한 소나기맛을, 가을의 묵혀둔 낙엽의 바삭한 맛을, 겨울의 알싸한 강바람 맛을 알려면 이제 그만 지나간 과거의 앙금들을 지워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이제 이쁘게 말하기로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