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고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니체의 일생을 다룬 책, <니체의 삶>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생기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해소하지 못한 의문들은 니체가 말하는 것과 내가 기존에 믿어왔던 것들이 부딪히면서 나왔다.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이 니체가 말하는 진리인데, 정말 이 세상에 불변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 불편함들에 대해 글로 적으면서 정리해 보려고 한다.
니체는 당시 사람들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종교와 과학을 대놓고 비판했다. 만고불변의 진리는 종교에도 과학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반시대적 고찰>의 1부를 쓰면서 최신 과학 서적에 빠져 지냈는데 그가 내린 결론은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이루어질 때마다 이전까지 믿었던 만고불변의 진리였던 진리는, 진리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니체는 과학에 대한 맹신을 경고하는 수준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믿음은 거짓이라고 비판했다.
<지식의 반감기>에서 저자 새뮤얼 아브스만은 어느 분야에서든 지식이 일정한 패턴을 두고 사라진다고 설명한다. 건강에 좋다고 생각했던 음식이 하루아침에 발암 물질로 기피 대상이 되는 것처럼 오래된 지식들은 틀렸거나 새로운 지식으로 교체되는 것이다. 새뮤얼 아브스만은 이런 변화가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과학은 이런 식으로 진보한다.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거나, 낡은 지식이 반박되거나,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것들이 단순한 쓰레기로 변하여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식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변 사물을 더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식으로 진보한다는 얘기다.
-새뮤얼 아브스만 (지식의 반감기, p. 64)
과학에 만고 불면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자체는 믿음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들 중 틀린 지식들이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더 과학적 진실 쪽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다. 인간이 완전히 잘못 혹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인류 역사를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가 이해하는 차원은 확실히 높아지고 있다. 과거의 지식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이 태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니체가 과격하게 '거짓'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나는 그가 전하려는 핵심은 맹목적인 믿음을 조심하라는 것일 것이다.
니체는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데 탁월했다. 그는 성경의 특정 문장을 완전히 뒤엎곤 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는 누가복음 18장 14절 말씀을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이다."로. 니체가 수정한 이 문장을 보고 나는 허를 찔린 것 같았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결국 언젠가 자신이 높아지기 바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예의 바른 행동은 어쩌면 나중에 보상을 받기 위한 가면은 아닐까? 이런 의문은 죽어서 천국을 가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게 하고 이는 종교 자체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수도원과 군대를 합쳐놓은 듯한 슐 포르타에서 학업을 마쳤던 니체가 종교적 규율을 강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종교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은 이해할만하다. 그는 기독교를 창시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표했지만 그의 이름으로 성장한 기독교를 혹독하게 비난했다. 더 구체적으로는 "쓰레기 같은 현실 대신 솜사탕 같은 영원의 세계를 담보로 전 인류를 노예근성에 빠뜨린" 교회와 사제들을 비난했다.
사후 천국에 가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율법주의 측면에서 니체가 비난한 부분은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크리스천인 나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거듭나면 지금 여기서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라고 믿는다. (물론 죽어서 가는 천국과는 다르겠지만) 내가 진실하다면 추구하는 가치는 나중에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지금 여기서 행복해야 한다. 그렇다면 니체가 현실에 충실하라는 말은 기독교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지향하는 부분이 같지 않을까?
니체는 연민이라는 감정이 아무 쓸모가 없고, 위험하고, 자신을 약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가장 높은 수준에서 도덕적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정서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니체는 그렇게 극복하고 싶었던 연민을 평생을 가까이 두고 살았다. 전쟁에 참여하며 무고한 파리 시민에게 연민을 느꼈고, 여성에 대해서 연민을 느꼈고, 사랑했던 루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자 자기 연민에 빠져서 살았다. 항상 주변을 맴돌며 그를 챙겨주었던 친구 페터 가스트와 많은 것을 의지했던 친구 오버베크 부부가 있었고, 정신병이 심해진 이후에 니체는 연민의 감정을 느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니체는 연민을 극복하는 것으로 동료에 대한 즐거움은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구분했지만 그 둘은 오히려 같은 감정으로 연결된다. 이것은 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적 연결을 통해 집단 내 협업과 나눔 덕분에 생존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우리는 서로 더 믿고 의지하면서 애정과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번성하려면 서로가 필요하고, 연민은 그 핵심 감정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은 물론이요,
타인을 위해서도 끈기를 발휘할 수 있다.
저녁거리를 사냥하든, 유모차를 밀고 언덕을 올라가든,
어려운 이웃을 돌보든,
우리는 그 안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 <움직임의 힘>, p.55
한 권의 책으로 니체가 말하는 어려운 말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현재에 충실하고 나의 인생을 살라는 것으로 정리해 본다. 많은 문제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서 온다. 그 괴리감을 줄여가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내 삶에 진실한지 성찰해보는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모든 것을 뒤집는 비판적 사고와 불확실성에 대한 인정,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는 그것을 위한 것이다.
#씽큐ON #니체의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