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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사 Jul 26. 2020

정작 참여해야 할 사람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4관왕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은 시상식 전, 한 미국 기자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오스카는 그냥 지역 영화제잖아요." (It's very local.) 오스카 시상식은 전년도 1월부터 12월까지 미국 LA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만을 후보로 하기 때문에 local이라는 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너무도 당연한 이 말이 이슈가 된 이유는 미국인들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세계 영화의 중심으로 여겨왔던 틀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이 한 마디로 깨졌기 때문이다.


"오스카는 국제 영화제도 아니고, 오스카는 그냥 지역 영화제잖아요." (사진 출처: www.theatlantic.com)

 

미국의 한국계 배우 산드라 오(Sandra Oh)는 한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고 말한다. 자신은 그동안 인종차별적인 영화계에서 아시아인이 차별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세뇌 (brain washed) 당해왔고, 스스로 가능성을 제한을 두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에서 한국인으로서 소수 인종이었던 적이 없었던 봉준호 감독에게는 자연스러운 표현이었을 것이다. 산드라 오의 말을 빌리면 이 표현은 미국인들에게 정말 세련된 공격 (sophisticated shade)이었다. 공격이 아니었지만 공격이었고 또 공격이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 큰 이슈로 부각된 "흑인들의 삶도 중요하다" (Black lives matter) 운동도 이와 같은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나와 너, 우리와 그들로 선을 긋고 분류한 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아닐까? 호모 사피엔스는 가는 곳마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호모 종들을 학살했고, 십자가 원정에 실패한 유럽인들은 마녀 사냥을 시작했다. 독일의 나치 세력은 유대인 상대로 대학살을 자행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간 개척자들은 유대인 대학살보다 더 노골적으로 인디언 원주민들을 학살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피터 버넷은 1853년, 인디언 종족이 멸종할 때까지 "박멸 전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출처: countercurrents.org)


우리는 누군가를 쉽게 손가락질하지만 사실 문제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서로를 구분하고 미워하고 싸운다. '같은 편'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하려면 최소한 하나의 '다른 편'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외부에 적을 둠으로써 내부의 결함이나 약점을 가리기도 한다. 이는 타자의 타자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타자의 타자성에 의해 형성된 정체성은,
내부에 있을지 모르는 타자의 흔적을 모조리 제거함으로써
응집력을 강화하기 마련이다.
출처: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 p.296


결국 '그들'과 '우리'를 나누는 것은 우리(특히 어떤 명분의 수호자들)가 생존하기 위함이다. <운명의 과학>의 5장, 지각하는 뇌 편에서는 나와 타자 (우리와 그들)를 구분하는 방식이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뇌가 방대한 과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패턴 인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탁월한 능력은 엄청난 재앙이 될 수도 있다. 모두가 결집해 대적할 "불변의 타자"가 있어야 한다는 프레임의 위험성은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의 저자 타밈 안사리 911 테러 직후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슬림 가문에서 태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성장했고 35년 간 미국에서 살아온 타밈 안사리는 911 테러 이후의 상황을 우려하며 친구들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이 편지에서 그는 탈레반과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비난의 화살을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국가로 돌려선 안된다고 우려했다. 탈레반과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을 무단으로 점령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그들의 희생자로 굶주리고 지치고 상처 받고 무능력하고 고통스럽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과 서구라는 편 가르기 프레임으로 카불 위로 날아가 폭탄을 떨어뜨린다면 탈레반이 강간했던 사람들을 다시 한번 강간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호소했다. 타밈 안사리의 이 편지는 세계적으로 확산되며 호응을 받았다.



모든 서사는 맥락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의 책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에는 "섞물리기"(bleshing)"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 단어는 지역적으로 다르게 형성된 이야기가 부딪히고 다투다가 결국 조화를 이루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서로 다른 서사가 '섞물린다'는 것은 그들과 우리가 섞여 '우리'가 된다는 말이다. 반대로 섞물리지 못한다는 말은 우리와 그들은 같은 편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두 가지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1) 지금껏 섞물리지 못했다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지금 섞물려 있다고 영원히 그러리라는 보장도 없다. 2) 섞물리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어느 때보다 다양성이 강조되는 시기이므로)


타밈 안사리는 우리의 목표는 모두가 똑같아지는 것도, 저들을 교화해 우리와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우리가 저들과 똑같아져 저들의 세계에 합류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세계 곳곳에서 각자의 길을 찾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관점에서 세계의 그림을 그리려면
많은 지적 관심과 힘겨운 탐구 과정이 필요하지만
모두가 '우리'고 누구도 '저들'이 아닌 세계 공동체를 건설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 p.535


"봉준호 감독님을 보고 깨달은 게 있어요" (출처: 왓차 유튜브)


산드라 오는 영화계에서 인종차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정작 필요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고 말한다. 다양성에 관한 논의는 항상 있었지만 선택과 행동이 없었던 이유는 이것이라고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직접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자리에 나가지 않으면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의 뇌는 새로운 경험과 의견에 노출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겠지만 그럼에도 시도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것이 누군가에게는 local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패러다임의 전환은 시작될 것이다.


#씽큐ON #다시보는5만년의역사


본 콘텐츠는 로크미디어와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는 체인지그라운드에서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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