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언제해야 할까?
지난여름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차를 타고 어딘가에 가고 있었다. 그리고 뒷좌석에 탄 삼 형제는 어느 때처럼 '불공평' 문제로 싸움이 났다. 문제의 발단은 1L 얼린 생수병이었다. 이동 중 목이 마르다고 할 아이들을 위해 냉장고에서 얼린 물에 수건으로 감싸서 차에 탔는데, 더우니 얼린 물병을 안고 있으면 안 되겠냐고 한 아이가 물었고 나는 그러라고 했다. 다른 두 아이들이 그럼 나도 안고 있고 싶다고 해서 나는 누가 먼저 얼마나 안고 있을 것인가를 나름 공평하게 (순서는 내 마음대로, 시간은 5분) 정해주었다!
타이머의 5분이 줄어드는 사이, 생수병을 안고 있는 셋째 아이의 생수병에 둘째가 손을 올려두었나 보다. 내 차례일 때 손을 대도 되는 것인가 안 되는 것인가 문제로 우리는 다시 논의했다. 둘째와 셋째는 내 차례에 누가 물병을 만지는 것은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괜찮다고 동의했고, 첫째는 만지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렇게 정리했다. "그러면 둘째 셋째 차례일 때 너희끼리는 만져도 되고, 첫째 너는 만지지 못하게 하는 대신 너도 만지면 안 돼."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첫째 차례일 때 셋째가 물병을 만졌고, 셋째는 아까 규칙을 정하기 전에 내 물병을 만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누가 얼마나 오래 만졌는지 문제로 다시 다툼이 시작되었다. 결국 누군가는 억울함에 분통을 터뜨렸다. 하아........
최근 읽은 <패거리 심리학>에 재미있는 실험이 나와 찾아보았는데, 이 원숭이 실험 (1분 25초부터 꼭 보세요)이 딱 우리 집 아이들 같다. 두 마리의 원숭이에게 같은 행동에 대한 보상(포도와 오이)을 다르게 주었더니 오이를 받은 원숭이가 포도를 내놓으라고 오이를 집어던지며 화를 낸 것이다. (원숭이들은 오이보다 포도가 맛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영상을 보던 청중들은 동시에 폭소를 터뜨렸다. 눈치 빠른 원숭이의 행동이 공감이 가고 귀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전에는 맛있고 좋았던 오이가 갑자기 저급한 것이 되었다.
비교하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 집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다툼 속에서 나는 깨달은 것은 내가 아무리 공평하게 대해주려고 해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불만도 문제도 싸움도 계속 생긴다. 공평함에 대해 가르쳐 주고 싶었던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거야."
하지만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결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논의는 여기서 시작되어야 한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모두가 다른 상황에서 태어난다. 같은 것을 주더라도 받아들이는 맥락과 해석도 달라진다. 저마다 원하는 것이 달라서 만족도도 달라진다. 일단 모두가 같은 것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공평하게 나눠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공평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우리는 불공평을 마주할 때 언제 분노하고 언제 분노하지 말아야 할까?
분노의 시기나 기준을 간단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분노한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사회적 정의를 추구할 때는 약간의 분노를 더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사회적 정의가 누구의 편에 서 있는지를 따져보면 이 분노가 과연 적절한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다음은 이번 씽큐베이션 6기 책들에서 찾은 대안을 정리해 본 것이다.
많은 경우에 원인은 나에게 있는 경우가 많고 그 원인을 나에게서 찾는 것은 몹시 불편한 일이다. 몇 달 전 나는 남편에게 화를 낸 적이 있다. 주말에 넷플릭스를 끝도 없이 보고 있는 남편을 보고 정말 한심하다고 말을 하고는 한동안 냉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내가 화가 난 것은 남편이 자기 계발하는 시간에 투자하지 않는 모습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그 시간에 나를 도와달라는 (집안일+아이들 놀아주기)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어떤 활동이 긍정적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일단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갈등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럴 때 희생양을 찾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가 단순한 답에 매달리는 이유는
자신이 믿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초집중>, p.229
자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많은 부모가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이며 디지털 기기의 문제라고 탓하곤 하지만, <초집중>에서는 상식적으로 온라인에서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이라면 다른 문제가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스크린 이용시간은 하루 5시간 이상일 때만 우울증과 연관성을 보인다) 아이의 이상한 행동의 책임을 디지털 기기를 탓하는 것은 심층적인 문제의 표면적인 답일 뿐이라고 말이다. 쉬운 답을 찾아내면 아이의 행동 아래 감춰진 어둡고 복잡한 진실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진실을 똑똑히 보고 근본 원인을 파헤쳐야 한다고 조언한다. 불편하지만 대면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쉬운 길이다.
<패거리 심리학>에서는 인지적 평가가 부족주의와 양극화라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훌륭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소개한다. 사람마다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반응하는 것이 다른 이유는, 사람들이 정서를 조절하는 데 사용하는 전략이 다르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이 전략을 긍정적인 요소에 집중함으로써 감정을 재평가하고 조절하는 데 쓰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일자리를 구하려고 면접을 봤지만 거절당했을 때, 나의 뇌는 내가 형편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로 나를 속이기 쉽다. 하지만 인지적 평가를 통해 자신이 내린 결론을 되돌릴 수 있다.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회사에서 다양성을 위해 다른 사람을 뽑았을 수도, 경험이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가 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패거리 심리학>의 저자는 이런 인지적 평가가 훈련이 되면 현실에서 부정적 감정을 완화하는데 더 능숙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처럼 가장 고질적인 문제에도 말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꾸미는 이야기에 변화를 주면 사건을 경험하더라도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 그래도 좋은 점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찾아보자. 두려움보다는 희망과 감사, 연민과 긍지를 갖고 접근해보자.
<5만 년의 역사>에서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동의하기만 하면 우리는 인간 앞에 닥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누구와 즉각 소통할 수 있는데 단 하나의 통합된 인간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리고 답을 내린다. ‘누구나 누구와’는 ‘모두가 모두와’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 다른 의미의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의 서사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멀리하고 우리에만 집중해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게 된다. 평생선을 좁혀가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하는 발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의견이 달라도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는 있지만,
일단 서로의 발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5만 년의 역사>, p. 524
이해하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패거리 심리학>에서 세라 캐버너는 상대의 관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무엇인가를 말하게 되면 갈등이 다시 시작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와 가까워지려면 상대방이 어떤 경험과 관점에서 그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정확히 알아야 좁혀나갈 수 있지만 우리는 의견이 충돌하는 것을 갈등이라고 생각하고 피하려고 한다. 이런 감정은 두려움에서 온다.
두려움이 밀려오면 내적인 것에 집중하며, 똑같은 것과 편안한 것을 받아들인다. 내집단에 매달리고 외집단을 멀리하며, 행동과 선택의 폭을 좁힌다. 이런 선택은 조금도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복잡한 문제를 당면할 때 바람직한 해결책은 바깥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다양한 관점에서 창의적인 조건과 협력을 구해야 한다. 도전을 맞아 두려움을 품으면, 열린 가능성과 행동이 필요한 경우에도 선택의 문을 닫고 좁히게 된다. -<패거리 심리학>, p.236
'누구나 누구와'가 '모두가 모두와'가 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은 있다. 일단 우리는 인터넷으로 제약 없이 쉽게 연결될 수 때문이다. 핸드폰과 소셜미디어에 관해서는 비관적인 관점이 있지만, 그것은 한 쪽 면만 본 것이다. (소셜미디어와 스마트폰을 극단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뿐 아니라 둘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부정적인 영향이 있다는 결과는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결국 고립되는 도구로 쓸 것인지 교감하는 도구로 쓸 것인지에 달려있다. 초반에 원숭이 실험처럼 누군가가 가진 것과 내가 가진 것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이해하는 공간으로 활용해보자.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불편함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은 생각보다 별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상대방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세라 캐버너는 <패거리 심리학>을 쓰며 자료를 조사하던 과정에서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반응이 거의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맹목적인 두려움과 무비판적인 칭찬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스마트폰과 SNS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결국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한 두려움(불편함)을 피하고 비슷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우리는 그들(너 or 외집단)보다 우리(나 or 내집단) 안에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분노가 커지는 것 같다.
분노는 분명 필요한 감정이지만 분노에 사로잡히고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대안은 다음의 세라 캐비너의 질문에 잘 나와있는 것 같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면 노력을 멈추고,
현재의 문제를 인정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정면으로 대응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 젊은 층과 마주 보고 앉아 그들의 관점을 묻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패거리 심리학>, p264
정리하면, 1) 현재의 문제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원인을 찾고) 2) 긍정적인 자세로 (인지적 평가 훈련) 3) 갈등을 마주하고 4)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의 점검 과정에 있어서 소셜미디어는 생각보다 꽤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고 활용해 보자. (물론 장단점을 알고 절제해서 썼을 때의 이야기다) 결국 그들도 넓은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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