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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사 Dec 13. 2020

그래도 들어야 한다

우리가 믿는 것과 다르면, '일단 거르고 보자'는 생각에 대하여

친한 교회 지인과의 최근 카톡 대화 내용에서 살짝 당황한 일이 있었다. 대화 몇 주 전에 최재천 교수님의 강연 영상을 추천해 주었고 이 분은 영상에 대한 의견을 주었는데, 다음이 그 카톡 내용이다. 최재천 교수님은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를 존경한다고 했는데 그는 대표적인 무신론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이고, 그가 쓴 다른 저서들을 읽지는 않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하는 책'들에 무신론의 대표 격으로 많이 소개되니 참고하라는 이야기였다. 더불어 영상의 교수님이 쓰신 책을 빌렸다가 '진화생물학자라는 것을 알고 걸렀다고' 덧붙였다. 나는 감안하고 읽고 있으며, 신앙에 방해를 받기보다는 분별할 힘을 기르기 위해 양쪽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했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다. 


문제는 '그가 쓴 다른 저서들을 읽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진화생물학자라는 것을 알고 걸렀다'는 부분이다. 지인 한 사람을 콕 집어서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내가 신뢰하는 누군가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거르는' 모습은 기독교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정치와 이념, 성별 차이 등 모든 사회 현상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며, 나도 쉽게 자주 실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가 믿는 것과 다르면, "일단 거르고 보자"는 생각에 대하여


수없이 많은 '편 가르기' 중에서도 위 대화에서 언급된 과학과 종교의 이야기에 집중해 보자. 물론 둘은 분명히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진화론이나 천지 창조론과 같은)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세상의 많은 부분이 여전히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과학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지향하는 더 높은 차원의 가치관을 대체할 수 없다고 믿는다. 


한 사람 안에서도 두 가지가 훌륭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있다. <아인슈타인의 전쟁>의 주인공,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세상이 주목하게 만든 에딩턴이다. 에딩턴은 영국의 인정받던 천문학자이면서 동시에 퀘이커교도였다. 이 책의 저자인 매튜 스탠리는 역사 속의 과학과 종교 간의 복잡한 관계를 연구해왔는데, 그의 학술 서적 2종 중 하나인 《실용적 신비주의: 종교, 과학, 아서 에딩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에딩턴은 그의 중요한 연구 주제였다. 



종교와 과학은 세계 1차 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에도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여겨졌다. '과학자가 종교적 신념을 주장하다니, 분명히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닌가?' 병역 면제 항소 심사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하던 에딩턴을 바라본 심사위원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이랬다. 당국자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당시 영국에서는 1차 세계대전으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서 군인이 부족해지자 사실상 강제 징병이 불가피해진 상황이었다.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던 퀘이커 교도들을 사회는 점점 심하게 조롱했고 괴롭혔다. 에딩턴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에딩턴은 자신이 속해있던 케임브리지 대학의 노력으로 그가 가진 과학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병역을 면제받았었는데, 그는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선언 없이는 과학적 업무를 이유로 면제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종교와 과학이 한 사람 안에서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서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딩턴에게 종교가 지향하는 바, 즉 평화주의는 자신의 삶의 목적이었고, 과학은 도구였다.


출처: <아인슈타인의 전쟁>, p.176


비록 '평화주의'를 고집하는 에딩턴의 종교 때문에 병역 면제 문제는 계속 복잡해졌지만, 그의 종교는 사실상 적국이었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일식 원정을 가능하게 한 핵심이었다. 현대 퀘이커 교도로서 그는 단순히 싸우지 않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장 중요한 계명을 적극적으로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에딩턴은 당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적국인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극대화되어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일식 원정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독일인의 이론, 연국인 천문학자들, 세 대륙을 가로지르는 여행"은 평화주의와 국제주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딩턴은 성공했다. 날씨와 전쟁과 거센 반대 의견 등 모든 불확실성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식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증명해 냈고 결국 전 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냈다.


에딩턴이 1919년 5월 29일에 찍은 일식 원정 (사진 출처: SCIENCE PHOTO LIBRARY)


<아인슈타인의 전쟁>에서 내가 가장 신비(?)로웠던 것이 에딩턴의 종교에서 비롯한 사명감이었다. (저자가 종교, 물리학 학사/ 천문학 석사 학위와 과학사 박사 학위를 받은 호기심의 중심에도 에딩턴이 있지 않았을까?) 그는 사람들이 반대 개념으로 생각했던 종교와 과학, 두 개념을 합쳤던 것뿐만 아니라 아국과 적국 (영국과 독일)을 큰 그림에서 "우리"로 보았다. 에딩턴은 한결같이 일관적이었고 거기에 편 가르기는 없었다. 그는 이렇게 정리했다.


"일식 원정은 독일 과학을 보이콧하자는 극단적인 이야기에 시의 적절하게 종지부를 찍은 바 있다. 우리의 국립 천문대는 '적국'의 이론을 테스트하는 데 앞장서고, 궁극적으로는 입증함으로써, 과학의 가장 훌륭한 전통을 보존했다. 그 교훈이 어쩌면 오늘날의 세계에도 여전히 필요한 것 같다. "
-<아인슈타인의 전쟁>, p.543, 545
마침내 만난 아인슈타인과 에딩턴


이 이야기는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와 같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움은 남는다. 그가 말한 국제적 협력의 "교훈"이 현재까지 잘 이루어지고 있고 있는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는 지금 세계 공동체에 살고 있지 않다. 왜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그 시점에서 끝이 났을까? 그 이후로 왜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났을까?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에서 저자 올랜도 파이지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 세계 공동체는 과거에 어쩌다가 불완전한 방식으로 형성되기도 했지만, 완벽하게 이룩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그 이유는 사람들이 에딩턴과 아인슈타인이 이뤄낸 업적을 찬양하는 데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룬 힘든 도전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에서 "우리는 서로 의견이 달라도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는 있지만, 일단 서로의 발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한 문장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의견이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로의 발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상대방이 어떤 맥락과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그들처럼 되는 것도, 그들을 교화해서 우리처럼 만드는 것도 아니라 "각자의 대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방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패거리 심리학>의 저자 세라 로즈가 제안하는 것 중 하나는 소설을 읽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뇌를 빌리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픽션을 읽고 나면
기존 세계관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생각한다.

-<패거리 심리학>, P.296


에딩턴과 아인슈타인도 소설을 즐겨 읽었다. (둘은 공통적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즐겨 읽었다) 같은 관점에서 영화나 드라마, 책을 보는 것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할리우드 특유의 미국 중심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IS를 다룬 (중동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보거나, 기독교 세계관과 다르니 진화생물학자의 책을 오히려 찾아서 읽어보는 것도 상대방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SNS를 활용해 내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협력의 분위기를 만드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듣는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한다. (어쨌거나 우리는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에 비하면 낫지 않은가)


시작은 아인슈타인과 에딩턴이 이룬 유산을 기억하며 평화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 것이다.


완벽한 형태의 세계 공동체가 생겨나려면 누군가 그것을 상상해야 한다.
또, 더 많은 사람이 그것을 상상해야 한다.
또, 많은 사람이 그런 세계가 진짜 있다고 믿어야 한다.
또 우리가 모두 마치 지금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듯이 행동해야 한다.
또 그 믿음이 지속되는 한 그 세계는 진짜일 것이다.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 올랜도 파이저스


#아인슈타인의전쟁 #씽큐베이션 #씽큐ON #체인지그라운드


*본 콘텐츠는 로크미디어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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