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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사 Apr 04. 2021

책을 편식했다면 몰랐을 것들

씽큐베이션 독서모임을 시작한 지 이제 9기가 끝나간다. 9기까지 오는데 가장 큰 전환점은 코로나로 인해 소규모 오프라인으로 진행되던 모임이 온라인으로 바뀐 것이다. 둘의 큰 차이는 온 vs 오프라는 만남의 형태뿐 아니라 책의 선정에 있었다. 기존에 책을 선정하는 전권이 그룹장에게 있었다면, 씽큐ON에서는 고 작가님이 선정한 큐블리케이션 책으로 진행하게 된 것이다. 둘의 차이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편식을 하느냐, 편식을 하지 않느냐의 차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그리고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이 영양을 섭취하는 데 좋은 것처럼, 당장 읽기는 잘 모르는 분야이거나 관심이 없어서 쉽지 않을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확실히 후자가 좋다고 생각한다.


씽큐베이션 3기_생각이 돈이 되는 순간(좌) 와 씽큐온 8기_실험의 힘 (우)


이번 책이 그런 책이다. <볼륨을 낮춰라>는 청력에 관한 책이다. 청력을 왜 보호해야 하는지,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이미 청력을 잃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지에 관한 내용인데, 사실 청력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 주제에 관해 관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읽어 내고 나면 늘 그렇듯이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다음 네 가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본 것이다.



1. 무심했던 문제를 인식하면, 대응이 달라진다.


이 책에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나의 청력에 문제가 없으며 앞으로도 문제가 없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다. 아주 시끄러운 소음이라고 해도 오랜 시간 노출되지 않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청력이 회복될 거라는 통념과 다르게 귀의 기관들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민감하며, 포유류의 털세포는 재생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다. 대부분의 신체 기관은 세포를 잃었다 다시 만들 수 있지만 고도로 발달한 우리의 귀는 한번 손상되면 재생할 수 없다.


귓속에서 새로운 세포는 주파수 대응 조직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인체는 새로운 세포를 원하지 않고 우리는 기존 세포들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싶어 한다. 안정성을 유지하고 제한된 자원을 보존하기 위해 자연선택은 수리보다는 내구성과 일관성의 편을 들었고, 포유류는 억제 유전자를 발달시켜 귓속을 어지럽힐 수 있는 새로운 털세포가 형성되지 않도록 막았다.
-<볼륨을 낮춰라>, p. 295


겉으로 심각한 문제가 없으니 괜찮을 거라는 생각도 안이했다는 생각이 든다. 헬렌 켈러가 듣지 못하는 것이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라고 말한 것처럼, 듣지 못하면 우리는 많은  정보와 일상의 대화들로부터 고립된다. 입술 모양을 읽고 내용을 추측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예민한 사람이라도 정확하게 이해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거기에 필요한 정신적 노력은 사람을 금세 지치게 만들기 마련이다.


청각이 일단 손상되면 복구가 불가하고, 손상이 되었을 때의 결과가 치명적이라는 문제를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예방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너무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최소한 큰 소음이 나는 상황을 피하거나, 불가피한 경우 귀마개나 여러 도구를 이용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The first step toward change is awareness.
The second step is acceptance. 
변화를 향한 첫 단계는 인식이다.
두 번째는 인정이다.

_Nathaniel Branden



2. 문제를 인정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예전에 가발 사업을 하는 분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분은 20대 초반에 탈모가 시작되었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린 채 베개를 털었고 머리를 감을 때도 머리 빠진 것을 보기 싫어서 화장실 불을 껐다. 6개월 간 집 밖을 나오지 않으면서 친구들과의 관계도 끊기 시작했다. 모든 게 절망적이었던 그가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었던 터닝 포인트는 '더 이상 머리카락이 안 빠지거나 다시 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직시한 순간이었다. 일단 상황을 인정하자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머리를 밀거나, 가발을 쓰거나. 어렵게 찾아간 가발샵에서 가발을 맞췄고 천만다행으로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때 대인기피증이 사라졌다고 했다.


다음은 우리 그룹에 있는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청각 장애인 분들을 돕고 계신 육순명 님의 글 중 일부다. 탈모와 청력 상실이라는 상황은 완전히 다르지만 어떤 상황이든 사람들의 대응은 위에 언급된 분들처럼 두 가지로 나뉜다. 상황을 인정하거나 부인하거나. 


주변에 청력상실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은 그들의 청력을 혹사시켜가면서 청각장애인이 되어서야 분노와 좌절감을 느낀다. 내가 가장 일하기 힘든 고객들이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현실을 수용하지 못해서 수화를 배우기 싫어하고 수치감 때문에 보청기와 인공와우 쓰는 일에 거부감을 느낀다.  더 심한 경우, 그들은 심한 사회적 고립감을 느껴서 우울증이 심해지고 홈리스가 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현실을 수용하고 해결책을 찾는 고객을 만나면 직업적으로 큰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메타인지가 높기 때문에 자신이 뭘 필요하는지 알고 조언가의 도움을 거부하지 않는다.
-씽큐ON 8기, 육순명 님의 <볼륨을 높여라> 서평 중


책에는 청각 장애를 가지게 된 아이의 부모의 대응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많은 청각 장애 아동이 일반 학교로 보내졌다가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그다음에 청각 장애인 학교로 오는데, 언어 습득은 8세 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어를 가장 잘 습득할 수 있을 때 청각 장애인 학교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어린 나이에 청각 장애인 학교에 들어온 아이들과 나중에 들어온 아이들의 성취도를 비교했을 대, 일찍 언어에 노출되어 의사소통이 가능한 환경에 놓인 아이들이 언어 능력이 더 뛰어났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발견했다고 한다. 아이의 장애를 초기에 인정했다면 가장 적합한 대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문제는 생길 수 있다. 하지만 회피하는 것은 문제를 더 키울 수도 있다.


3.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 해법이 달라진다


청각 장애인들이 대화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말하는 사람의 입술을 읽는 구화법과, 손동작으로 대화하는 수화법이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과거 미국에서는 청각 장애인들이 수화를 할 수 없도록 금지시키고 구화법만 가르쳤다고 한다. 구화법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강조한 사람들의 '인도주의적'인  목적은 청각 장애인을 "말하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통합시키기 위한 것이었는데, 생각해보면 이건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것처럼 위시하면서 철저히 말하는 사람들 위주로 생각한 것이다. 입술 읽기는 듣기를 대체할 수 없다. 그나마 성공적이 되려면 1) 말하는 사람이 한 명이어야 하고, 2) 느리고 3) 정확하게 발음해야 하고, 4) 듣는 사람이 완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하고 또 5) 충분한 훈련이 선행되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모든 것이 완벽한 상황이 되는 경우는 사실상 거의 없지 않은가.


본인이 청각 장애인인 제프리 브라빈은 현재 미국 청각 장애인 학교(ASD)의 총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이중/이중 접근법'이라고 알려진 청각 장애인 교육 방법론을 주도하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 수화를 금지시키자 친구들과 화장실에서, 테이블 밑에서 혹은 선생님이 안 보고 있을 때마다 서로 수화로 이야기했을 정도로 청각장애인들이 수화를 필요로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수화법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학교에는 수화와 말을
모두 유창하게 할 줄 아는 아이도 있고 없는 아이도 있지요.
모든 아이가 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쉽게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둘을 모두 제공하는 것을 학교의 철학으로 삼지요.


모든 아이가 다 다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짐작하고 한 가지 대안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을 소개해 준다는 이 학교의 철학이 너무 공감이 된다. 나에게 아무리 좋아 보이는 방법이라도 상대방에게 맞지 않을 수 있다. 세상에는 한 가지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4. 편견을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면, 태도가 달라진다


나는 남동생이 다운증후군이라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 일반인들과는 조금 다르다. 보통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불행한 삶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냥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면 별 다를 것이 었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나는 남동생이 복지관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너무 재밌는 시간이었다. 아래는 옆에 앉아 있던 나래에게 남자 친구가 있냐고 물었더니 내 동생을 가리키며 '여기 있잖아요.'라고 했고 그러자 동생이 '이러니 내가 할 말이 없다'며 웃는 장면이다. 지적 장애인들을 만나면 불편할 것 같지만 너무 솔직한 모습에 마음의 장벽이 다 허물어진다.



그래서 최근 읽은 책, <볼륨을 낮춰라>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칠마크(Chilmark) 부분이었다. 1800년대 후반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칠마크에서는 인구의 약 4% (특히 스퀴브노켓 이라는 마을 주민의 1/4)이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에 청각 장애가 집중되었던 것은 세대를 거치면서 열성 유전 돌연변이가 영향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그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칠마크는 주민들은 누가 청각 장애가 있었고 없었는지를 서로 기억하지 못했을 정도로 300년간 듣지 못하는 것이 "그냥 평범했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좌)/slideplayer.com(우))


1970년대 후반, 칠마크의 청각 장애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박사 논문을 썼던 노라 그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분명히 장애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모두가 수화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수화는 청각 장애인들만의 대화법이 아니었다. 청각 장애인이 다수를 차지하다 보니 장애가 없던 사람들도 당연하게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것처럼) 수화를 배웠던 것이다. 그래서 칠마크에서 듣지 못하는 것이 '그냥 평범한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좋다. 왜냐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장애가 평범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화를 배우지 않더라도, 우리는 마서즈빈야드 청각 장애인 공동체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장애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개 무지에서 비롯된 문화적 개념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주요한 면에서 그들의 세계는 대다수가 듣지만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우리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주요한 차이는 그들이 우리 대부분은 해 보지 못한 방식으로 상황을 해결했다는 점이다. 기술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차이를 메우도록 돕는다 해도, 우리에게는 인내와 공감, 이해심 또한 필요하다.
-<볼륨을 낮춰라>, p. 287    


이 책은 좁게 보면 청각에 관한 책이지만, 넓게 보면 어떤 인식하지 못했던 문제를 제대로 알고- 받아들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서- 해결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위에서 <볼륨을 낮춰라>의 저자, 데이비드 오언이 말한 것처럼 주요한 면에서 그들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세계의 간극은 기술뿐 아니라 인내와 공감, 이해심을 통해 메꿔질 수 있다.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는 책에서 저자가 언급한 위 부분에서 묘한 감동을 받았다. "나는 이곳을 방문하고 난 후 청각 장애와 나의 귀, 언어, 그리고 모든 종류의 장애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나도 그렇. 내가 책을 편식했다면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도 못했을 일이다.



#볼륨을낮춰라 #씽큐베이션8기 #체인지그라운드 #청각 #큐블리케이션

*본 콘텐츠는 제작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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