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그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많은 경우, 책임을 질 상대 혹은 원망할 대상을 찾는다. 그런데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닌 경우,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어떤 것일 경우 그 모든 원망과 비난이 부질 없어진다. 쓰나미가 와서 한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누구를 원망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의 원인에 악의가 없다고 하면 그 원망과 비난의 화살이 갈 길은 없어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로마 황제가 쓴- 위대한 고전 중 하나로 불리는- <명상록> 에서는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외적인 일로 네가 고통받는다면,
네게 고통을 주는 것은 그 외적인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네 자신의 판단 때문이기 때문에,
너는 즉시 그 판단을 멈춤으로써 고통을 없앨 수 있다.
네 자신의 생각에 네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원인이라면,
너는 얼마든지 그 생각을 바꿀 수 있고,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고통은 자신의 판단에서 오는 것이고, 그 생각을 바꾸기만 한다면 고통을 통제할 능력이 있다는 말은 자칫하면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 고통받고 있는 것은 '너의 의지 부족'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다. 실제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통을 통제하는 것은 2000년이 지난 지금, 의학적으로 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그 고통이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말이다. 단지 판단을 멈추는 행위만으로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 뿐이다. 간단하지 않고, 오래 걸리는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통증을 줄이고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은 확실히 있다. <고통의 비밀>의 저자 몬티 라이먼은 그 방법을 여러가지로 제시하는데, 나는 그 방법을 개인적 차원에서의 3가지 관점의 변화 (이해, 수용, 긍정적인 마음) 로 정리해 보았다.
<고통의 비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표현은, 통증은 '우리를 지켜주는 보디가드이자 수호천사'라고 하는 부분이다. '통증은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고 통증은 없애야 한다는 생각', 즉 통증이 적이 아니라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통증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어떤 것이 진짜 통증이고, 어떤 것이 진짜 통증이 아닌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통증에 대응하는 법을 배워나가야 한다. (<고통의 비밀> p.132)
통증에 담긴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확실한 치료법이 될 것이다. (<고통의 비밀> p. 140)
현재의 상태를 수용한다는 말은 희망을 버리고 상황에 굴복하라는 말이 아니다. 지금 내 생각과 감정, 감각에 더 귀를 기울이는 방법으로 내가 느끼는 통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호흡법, 명상이나 요가 등을 활용한 마음챙김에 기반한 심리치료는 실제로 효과가 있다. (1만 시간 이상 명상 경험이 있는 불교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통증을 일으키는 실험을 했을 때, 명상 경험이 짧은 초보 수련자들보다 통증을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정도가 매우 낮았다) 스토아 학파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판단하지 말라'고 한 말도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고 그때그때 느끼는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믿은 것과 맥락이다. 단, 수용은 포기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함으로써 내 상황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짜 통증이고 어떤 것이 진짜 통증이 아닌지 구분할 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응하는 방법을 배워나갈 수 있다.
고대인들 역시 고통이 감각뿐 아니라 감정이나 인지와도 관련이 있음을 간파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 상황에 반응하는 법은 통제할 수 있다. 마음챙김 수련, 인지 행동 치료, 수용 전념 치료, 최면 치료 같은 치료법은 그같은 사고의 영향을 받은 현대식 통증 치료법이다. 수용적 태도가 만성 통증의 치료제는 아니지만 치료를 위한 첫 번째 단계임은 분명하다. 통증과 싸우기보다 통증을 수용하면 더 잘 견딜 수 있다는 말은 역설적이지만, 통증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전혀 역설적이지 않다. (<통증의 비밀>, p.214)
당연한 말일지 모르지만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 즉 세상은 정의롭고 자신이 뿌린대로 거둔다는 신념이 강한 사람일수록 부당함ㅁ에 대한 인식으로 고통을 더 많이 받는다. 여기서 우리는 모순에 빠진다. 우리는 부당함과 싸워 이기고도 싶고, 만성 통증에서 벗어나고도 싶다. 하지만 부당함과 싸우는 데 필요한 생각과 행동, 감정은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부당함과 관련된 통증을 가라앉히는 데는 심리적 유연함과 수용적 태도를 키우는 치료가 도움이 된다. 수용은 포기하고 굴복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수용을 통한 치유는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한 개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깨닫게 한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쉽게 해결되는 방법은 없다. (<통증의 비밀>, p. 196)
수용 전념 치료에서 말하는 수용이란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용은 실제로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심리적 유연성을 기르는 방법이다. 수용 전념 치료에서는 통증과 싸우거나 통증을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통증의 비밀>, p. 137)
몬티 라이먼은 통증이 줄어드는 것은, (몸이 치유된 직접적 결과가 아니라 치유되고 있거나 통증을 일으키는 자극이 제거되었다고) 뇌가 인식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위약이 증상을 개선 시키거나 가짜 수술이 진짜 수술만큼 효과가 있었던 수많은 플라세보 사례들은 우리의 믿음 덕분이다. 우리의 기대와 희망은 실제로 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을 긍정적으로 업데이트 할 수 있다. 뇌가 기대할 수 있는 실제적인 확신을 심어줄 수 있다.
뇌는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최대한 정확히 예측하기 위해 뇌가 가진 세상에 대한 기대, 생각, 믿음(즉, '기존 정보들')을 토대로 새로 들어오는 감각 입력들과 균형을 이루려 한다. 뇌는 정보 처리 기관이 아니라 미래 예측 기관이다. 우리는 뇌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 (<통증의 비밀>, p.111)
<통증의 비밀>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통증과 쾌락은 반대 개념이 아니라는 부분(6장)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고통은 피해야 할 것, 즐거움은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알아왔다. 하지만 여기에 의문이 있었다. (자기계발을 좋아하는 나는) 미래의 보상을 위해 지금의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때론 모순이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해답을 얻었다. 고통과 쾌락은 붙어있다. (뇌에서 고통과 쾌락을 감지하는 부위는 특히 보상 체계와 관련된 영역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다-p.151) 똑같은 자극도 상황에 따라 고통스럽기도 하고 즐거울 수도 있다. 덜 고통스러워지는 것 만으로도 즐겁게 느껴질 수 있다. 같은 고통도 더 주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고통도 즐거움이 될 수 있다.(고통을 정복했을 때의 보상 혹은 게임과 같이 즐거움이 더 클 때의 고통) 그렇다면 고통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가 핵심이다. 일단 상황은 벌어졌다. 그 후에에 고통을 판단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부정적인 생각만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황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다. 다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언을 보니 이보다 더 좋은 해결책은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즉시 그 판단을 멈춤으로써 고통을 없앨 수 있다. 우리는 얼마든지 부정적인 생각을 바꿀 수 있고,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참고:
1. <고통의 비밀>, 몬티 라이먼
2.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