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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사 Jul 09. 2019

선을 절대 넘어오지 말라고?

선을 넘어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최근에 '체르노빌'이라는 5부작 미드를 봤다. 20세기 최악의 인재人災라고 불리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같은 드라마다. 주인공인 레가소프 박사는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미미한 폭발이 있었는데, 정부에서 참고인으로 소환한 것이다. 레가소프 박사는 정부 관료들이 묘사하는 것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원인을 규명하고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사고를 수습해야 할 정부는 사고를 축소하고 과오를 덮기에 바쁘다. 그는 원전 폭발사고의 진상 조사 위원회 소속으로 수습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당시 사고의 원인에 대해 면밀히 조사한다. 원전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은 원자로의 결함이었지만, 소련의 압력을 받은 레가소프 박사는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 원자력 기구 특별 회의에서 원자로의 결함이 아닌 원자로를 운영한 연구원들의 과실이라고 증언하였고, 2년 후 죄책감을 못 이긴 레가소프 박사는 조사 보고서와 녹취록 등을 남기고 자살한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당시 사진 (좌)/ 발레리 레가소프 Valeri Legasov 박사(우)


'체르노빌'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핵심 키워드는 불통不通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은 획일화된 명령체계로 개인의 의견을 묵살하는 한편,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정보를 조작하고 은폐하게 된 것이다. 폐쇄적인 관료체제는 이런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미 일어난 문제를 누구도 인정하지 못하고 드러내 해결하기보다는 숨기고 조작하게 된 것, 체르노빌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오랜 시간 여러 문제들이 쌓여서 터진 것이다.


통하지 않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면 소통의 결과는 어떨까?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이 저 정도였으니 옛날 신분사회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꽉 막혀있을 것 같던 조선시대에도 신분의 벽을 넘어서 교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음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박제가와 이덕무의 이야기다.


(이덕무)... 그러나 정작 같은 나라 사람들과는 사귀기가 쉽지 않았다.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고 적다는 이유로, 가진 것이 있고 없다는 이유로, 서로가 속한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미리부터 사람들 사이에 금을 그어 놓았기 때문이다. - <책만 보는 바보>, p.150
(박제가) "나는 위아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정말 싫습니다. 예의를 지키라는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집안이나 신분,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고개를 들고 숙이는 것을 정하라는 게 아닙니까? 옳고 그름에 따라 고개를 들고 숙여야지, 어찌 그 사람의 껍데기만 보고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책만 보는 바보>, p.63


저들이 저런 말을 했던 이유는 그들이 서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서얼: 사대부 집안 출신이었지만 첩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소외된 중간계층) 학문적으로 재능이 출중했지만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그들은 차별이 없는 세계를 동경했다. 같은 서얼 출신들만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아니었다. 박제가와 이덕무가 속해 있었던 백탑파에서 함께했던 벗 이서구는 부족함이 없는 명문가의 자제였고, 그들이 스승으로 모셨던 담헌 홍대용 선생과 연암 박지원 선생은 그들을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홍대용 선생은 보위에 오르기 전의 정조를 가까이 모시면서, 능력은 있되 쓰이지 못하는 불우한 인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자네들에게도 좋은 날이 꼭 올 것이니,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하며 자신을 갈고닦게.
-담헌 홍대용


백탑으로 불리던 '원각사지십층석탑' (좌)/ 백탑파 구성도 (출처: KBS <다시 보는 역사저널 그날> 박지원편)


실제로 이덕무는 1799년, 마흔을 한 해 앞두고 정조에 의해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기용되면서 벼슬길이 열렸다. 관복을 입고 처음 입궐하던 날, 이덕무의 아버지는 잠긴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밝은 세상을 만나 네가 이제야 빛을 보는구나!" 하지만 나는 '밝은 세상'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암 박지원 선생,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 백동수.. *백탑파로 불렸던 그들이 신분과 나이를 넘어 교류하면서 실력을 키워왔기 때문에 세상이 알아본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혼자였다면 이렇게까지 큰 변화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덕무가 보이지 않는 운명 앞에서 주눅이 들고 두려움과 무기력감에 절망하던 날, 같은 처지였음에도 운명에 맞서 싸우겠다는 자신감을 보이던 박제가를 만났다. 홍대용 선생으로부터 둥근 지구에 대해서, 지구의 중력에 대해서, 지구가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배웠다.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자리가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세계관을 깨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박지원 선생으로부터는 다른 사람이 열 가지를 배우면 우리는 백 가지를 배워, 먼저 우리 백성들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얻었다. 이덕무는 이런 스승의 가르침과 벗들과의 사귐을 통해 이덕무는 언젠가부터 운명을 더 이상 탓하지 않게 되었다. 중년을 바라보게 되었을 즈음 자신보다 한참 어리던 이덕무에게는 유학과 경제, 의학 등 다른 분야도 폭넓게 공부하기를 격려하는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 달랐던 그들은 그 다름을 통해 배웠다. 새로운 생각과 좋은 책을 나누었다. 서로를 아끼고 소통하면서 그들은 더 성숙할 수 있었고, 세상을 향한 원망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선입견을 버리고 소통하는 것,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함께 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홍대용)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느끼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사물을 받아들인다.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싶은 것, 인정하고 싶은 것을 미리 정해두고, 그 밖의 것은 물리치고 거부한다. 그러한 마음에 기초가 되는 것은 역시 지난날에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고 들은 자신만의 감각이나 경험이다. 이것이 바로 선입견이다. (중략) 사람과 사귈 때도 신분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을 먼저 보게 되니, 참다운 벗을 만나 마음을 나누기도 어렵다. 선입견은 결국, 자신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람과 사물의 본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는 편견이기도 하다.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힌 세상은 새로운 활기라고는 없는 세상, 변화를 거부하는 낡은 것들로만 가득한 세상일 것이다. -<책만 보는 바보>, p. 176-177


어떤 상황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지진이 수백년동안 지속된 충격으로 충돌 위험이 쌓이다가 어느 날 비슷한 충격에 발생하는 것처럼, 대나무가 처음 5년간 땅속 광범위한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동안 거의 눈에 띄지 않다가 이후 6주만에 지상 30미터 높이로 자라는 것처럼,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덮다가 지속적으로 쌓인 안전 불감증으로 터진 것 처럼, 변화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정조가 서자들을 등용시킨 것처럼 말이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당사자는 흐름을 인지하고 충분히 고민해야 적절하게 대응 수 있.  무언가 거대한 것을 해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처한 환경에서 그 상황을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대응하는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그래서 미리 공부를 하고 준비해야 한는 말이다.


아버님의 시대보다 나의 시대가 더 나아졌든, 나의 아들들의 시대는 좀 더 나아지리라. 머지않아 세상에 태어날 나의 손자의 시대는 더욱 그러하리라. 우리 후손은 못난 조상처럼, 소중한 삶을 탄식과 분노로 오랫동안 소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노라면 스스로가 빚어낸 삶이 희미한 빛을 낼 때가 있지 않을까. (중략)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삶에서 세상이 달라지고 있음을 직접 느끼고 체험하였다. 저 아이들의 시대는 더욱 달라지고 나아질 것이다. 아이들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 것이라, 나는 믿는다.
- <책만 읽는 바보>, p. 245-248


이덕무의 말처럼 세상은 계속 더 나아지고 있다. 그리고 소중한 삶을 탄식과 분노로 오랫동안 소모할 것인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할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물론 혼자서는 어렵다. 함께할 사람을 찾아 그어진 선을 넘어 소통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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