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사 오기 전 동네에서 살던 아들친구 엄마한테 아주 오랜만에 (약 2년) 문자가 왔다.
답을 할까 말까 잠깐의 고민 후, 일단 답을 유보하고는 그 상태로 두었다. 솔직히 '책을 팔려고 하는 게 아닐까? '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2년 전 전화가 왔을 때, 아동출판사에 다니던 이 분이 자기 좀 도와달라며 책을 사주기를 강권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 교육은 이렇게 해야 한다며 교육받은 것을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데 굳이 반박은 하지 않았다. 학습지는 시키지 않을 예정이라며 어색하게 거절을 하고는 기분이 찜찜했었는데 그 이후로 처음 전화가 왔던 것이다...
오랜만에 연락을 받는 경우, 먼저 이렇게 반응을 하게 된다. '결혼을 하나? 아니면 보험상품을 팔아야 하나? 뭐가 필요한 거지??' 반대로 내가 오랜만에 연락을 하게 되는 경우는 결혼식을 앞두고 청첩장을 줘야 하는 시기가 될 수 있겠다. 정말로 축의금을 받고 싶거나 사진 찍을 친구가 필요해서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렇게 보이기 싫기 때문에 연락을 주저한다. 오랜만에 지인에게 연락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이렇게 상대방(혹은 나)의 의도가 불순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인간관계를 사적인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너무나 많이 봐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연락을 주저하는 더 큰 이유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동종 선호 homophily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좀 더 친숙하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거나 조언을 얻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오랜만에 연락을 주고받는 것은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환영할만한 일이다. 모든 사람이 서로를 알고 있는 긴밀한 집단의 경우 서로 알고 있는 지인과 정보는 중복되기 마련이라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정보 외에 새로운 정보를 제공할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마크 그래노베터의 "약한 연결고리의 강한 힘 The Strength of Weak Ties"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등장했다. 나를 가장 잘 알거나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이 제공할 수 있는 정보보다 드물게 연락하던 지인에게서 얻은 조언이 더 새롭고 유용하다는 것인데, 많은 사례와 실험들이 이 '약한 유대 Weak Ties'의 힘을 증명하고 있다.
책 <친구의 친구>에 소개된 한 실험 결과가 흥미롭다. 이 실험에서는 오랜 기간 '휴면 상태였던 유대관계가 어떤 힘을 가지는지' 연구하기 위해 경영자 MBA 과정을 밟고 있던 224명의 기업 임원들에게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는 회사의 주요 프로젝트에 조언을 해줄 만한
1) 최소한 3년 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과거 인맥(A, B)과
2) 이미 조언을 구한 바 있는 현재 인맥 두 사람(C, D)을 고르게 했다.
네 사람(A, B, C, D)의 조언은 어떻게 달랐을까? 짐작했겠지만 옛 동료들(A, B)의 조언이 훨씬 가치가 높았다. 그들이 예상치 못한 통찰력이나 참신한 조언을 해줄 확률 역시 더 높았다. 물론 옛 동료(A, B)가 자신들 기억 속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을 확률도 있기에 다른 실험도 진행했다. 휴면 상태의 인맥을 단지 두명만 고르는 것이 아니라 열명을 고르고, 예상되는 조언의 가치에 따라 순위를 매긴 것이다. 결과는? 순위는 상관없었다. 조언의 가치는 (그 사람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휴면 상태라는 사실 자체와 관련이 있었다.
약한 유대관계들은
전혀 다른 출처에서 유래한 아이디어를 조합함으로써
더 많은 실험을 할 수 있게 하며,
강한 유대관계들보다
사회적 관심이나 대세에 따라야 한다는 부담이 덜합니다.
- 마틴 루프 Martin Ruef
요즘 산업을 주도하는 많은 창의적 기업들은 이런 약한 유대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 팀에 모여 과제를 수행한 후 새로운 팀에 지원하여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디자인 컨설팅 업체 IDEO가 그렇고 (하단 이미지 참고), 핀란드의 게임회사 슈퍼셀 SuperCell이 그렇다.
슈퍼셀 SuperCell은 ‘슈퍼’ 파워를 지닌 각각의 세포들이 모여 만들어진 회사라는 뜻이다. 트립 호킨스는 이 회사를 창업하면서 "팀"에 가장 신경을 썼다. 슈퍼셀의 개발자들은 5명에서 7명의 셀(cell,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셀들이 자신의 게임 아이디어를 내고 게임을 만든다. 게임이 재미있으면 팀 전체가 게임을 같이 해본다. 팀 전체가 좋아하면, 캐나다의 앱 스토에 올려본다. 여기서 성공하면 전 세계 앱스토어에 올린다. 대부분의 게임 스튜디오들이 게임이 제작되면 관리자가 승인을 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게이트키퍼가 없으니 아이디어는 차단되지 않고 더 많이 시도될 수 있으며, 당연히 개발 속도도 빠르다.
하지만 이런 약한 유대를 활용하려면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슈퍼파워'를 지닌 슈퍼셀처럼 각각의 세포의 실력이 충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 소개된 실험에서 쉽게 간과할 수 있는 포인트도 이것이다. "회사의 프로젝트에 도움을 줄만한"이라는 수식어가 그렇다. 나와 상대방의 충분히 갖춰진 역량이 만났을 때 시너지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를 이끈 권오현 회장이 쓴 <초격차>에서도 맥락적으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사일로에 관한 부분이다. 이 책에서는 곡식 및 사료를 저장해두는 굴뚝 모양의 폐쇄형 창고인 사일로를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된 조직이라고 보고, 조직 문화 개선을 위해 사일로를 깨뜨려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는데 문제는 삼성의 경우 충분히 조직의 역량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이 말이 맞을 수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 사일로 안에서 충분한 성숙이 없는 상태에서는 소통(연결)부터 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적 성숙이 되지 않은 상태로 그저 많은 사람들과 교류해봐야 효과를 볼 수 없다.
결국 내가 가진 인맥 네트워크를 질적으로 향상시키려면 우선 내가 실력이 뛰어나야 한다. 그렇다고 아직 충분히 무르익지 않아 당장 서로에게 줄 유익이 없다고 할 경우에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에 충실하고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신뢰를 상대방에게 심어준다면 이후에 '약한 유대'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연락을 하게 되더라도 과거에 신뢰가 형성이 되어있는 사이라면 거부감보다는 반가움이 먼저 생길 것이다.
나는 신뢰가 실력을 포함하는 상위단계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렇다면 위에 한 말, "하지만 오랜만에 연락을 주고받는 것은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환영할만한 일이다."에 한 가지 단서를 붙여야 할 것 같다. 오랜만에 연락을 주고받는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나와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효과적이라고. 이런 관점에서 결혼식 청첩장을 주려고 고민하고 있다면 '연락하지 않은 기간'이 아니라 그와 나 사이에 '최소한의 신뢰'가 형성되어있는지를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아들친구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답문을 하지 않을 예정이다. ㅠ)
결국 핵심은 연결에 있다. 그리고 네트워크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신뢰가 기본이다.
#씽큐베이션 #1주1서평 #체인지그라운드 #친구의친구 #연결 #인간관계 #실력은어떻게만들어지는가
참고:
1. <친구의 친구>, 데이비드 버커스
2. <신뢰이동>, 레이첼 보츠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