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는 내가 손에 꼽는 좋아하는 책이다. 내가 몰랐던 사실들을 너무 많이 알려주었고, 인류의 거대한 역사를 단순한 사실 나열이 아닌 저자의 관점에서 풀어내며 엄청난 인사이트를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책은 나의 궁금증 하나를 해결해 주었었다.
내 질문은 왜 누군가는 세계를 정복하고 다른 누군가는 뒤쳐졌는가에 관한 것이었고, 유발 하라리의 대답은 정복자들은 자신들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거 제국 추구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추청 하는 경향이 있던 반면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새 영토뿐 아니라 새 지식을 획득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술이 부족해서는 뒤쳐졌던 것은 아니었다)
아즈텍 사람들은 스스로 온 세상을 다 알고 있으며 그중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피엔스>, p.413
1420년대 정화 제독을 동아프리카까지 보냈던 자원이면 아메리카까지 도달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그저 관심이 없었다. -<사피엔스>, p.418
최근 인류의 역사를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책, <모기>를 읽으며 <사피엔스>에서 내가 얻은 답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역시 책 한 권만 읽고 다 안다고 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모기>에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 고집스럽게 틀렸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자신이 모른다고 인정해서가 아니라)이 말은 작가이자 퓰리처상 수상자인 저널리스트 토니 호르위츠가 한 말이다.
콜럼버스가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고집스럽게 틀렸기 때문이다.
-토니 호르위츠 Tony Horwitz
<사피엔스>와 <모기>는 완전히 다르다. 유발 하라리는 원인을 인간의 인지적 행동에서 찾았고, <모기>의 저자 티모시 C. 와인가드는 원인을 환경과 질병에서 찾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1517년경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이 멕시코 어딘가에 강력한 제국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 제국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불과 4년 뒤에 아즈텍의 수도는 잿더미가 된다. 멕시코 제국을 단시간에 정복한 스위스 탐험가는 에르난 코르테스. 그가 아즈텍을 정복했던 이야기는 많은 책들을 통해서 신화처럼 묘사된다.
1519년 7월 아즈텍에 도착한 코르테스는 자신을 스페인 왕의 평화사절이라고 거짓말을 하고는 왕에게 접견 요청을 한다. 코르테스는 왕을 접견하자마자 포로로 잡아 궁전에 감금하고 제국을 간접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아즈텍 제국의 왕이었던 몬테주마 2세가 이 이방인의 말을 순순히 들었던 이유는 당시 금발의 흰 피부를 가진 신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유럽인들의 외모가 이와 비슷했기 때문에 왕은 코르테스를 신의 사자로 여기고 왕권을 선뜻 내놓은 것이다. 당시 극도로 중앙집권적이었던 아즈텍 제국은 이때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아즈텍 엘리트들은 몬테주마 2세와 코르테스에 반기를 들고 새 황제를 선출했지만, 코르테스는 그동안 얻은 지식으로 제국을 분열시켰다. 피지배 계층이 자신을 도와 아즈텍의 엘리트 지배층에게 대항하도록 설득한 것이다. 반란에 가담한 민족들은 코르테스에게 수십만 명의 현지인 군대를 제공했고, 그 사이 스페인 군인들과 정착자들이 멕시코에 도착했다. 코르테스는 아즈텍 해변에 상륙한 지 불과 1세기 만에 제국을 정복했고, 원주민들은 90퍼센트 이상 사망했다.
<사피엔스>에서는 남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이유를 아즈텍인과 잉카인의 무지에게서 찾는다.
만일 아즈텍인과 잉카인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조금만 더 관심이 있었다면 - 그리고 스페인인들이 자신들의 이웃에게 한 짓을 알았더라면 - 이들은 스페인의 정복에 좀 더 격렬하고도 성공적으로 저항했을 것이다. -<사피엔스>, p. 412
하지만 <모기>에서 말하는 원인은 완전히 다르다. 와인가드는 진짜 이유는 유럽인들이 데려온 질병과 그들이 가졌던 서로 다른 면역체계 덕분이었으며 이 원인은 대부분의 식민지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600만 명의 아즈텍족을 점령한 것은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니었으며, 1천만 명의 잉카족을 예속시킨 것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아니었다. 이 두 명의 콩키스타도르는 천연두와 말라리아열 유행병으로 무너진 아즈텍족과 잉카족을 찾아가 소수의 병든 생존자들을 긁어모은 뒤 노예로 팔아넘겼을 뿐이었다. -<모기>, p.235
진짜 원인은 둘 다 맞다. 하지만 어떤 것에 더 중점을 두고 해석하는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두 책의 해석의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1) 인간의 무지는 통제가 가능한 영역이고, 2) 질병과 면역체계는 통제가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어느 해석이 더 맞는지는 가정을 해보면 된다.
앞의 해석으로 본다면 당시에 그때 그것을 알았더라면 역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결과를 알고 있는 지금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미 일어난 일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만약 말라리아 백신을 과거로 가지고 가져갈 수 있으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과거를 돌아보며 우리가 상상하는 수많은 'what if... (그때 그랬더라면)'의 가정 중에서 <모기>의 저자 와인가드너는 이런 상상을 한다. 17세기 중반 식민주의가 태동하던 시기 네덜라드인들과 영국이 희망봉에서 인구밀도가 낮은 코이산 족 목동들이 아닌 인구밀도가 높고 철기를 갖추었으며 열대 말라리아에 맞서 유전자 변이가 나타났던 줄루족과 코사족을 만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기>는 말한다. 인류의 역사를 바꿔온 것은 인간이 아니라 모기라고. 탁 치면 죽는 가소로운 모기가 제국의 성공 혹은 실패의 원인이라고 하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앞부분만 읽기 시작하더라도 알 것이다. 모기가 수천 년에 걸쳐 역사를 어떻게 조작해왔는지.
새로운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게 해 준 것만으로도 나는 이 책에 별 다섯 개 중 다섯 개를 모두 줄 것이다. 읽다 보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콕콕 집어주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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