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를 읽고...
나는 홀러 코스트 영화를 좋아한다. 잔인하고 무섭지만 그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사울의 아들>, <리멤버>, <블랙북>, <버스터즈: 거친 녀석들> 등... 그 시대를 담아낸 훌륭한 영화들을 보며 짐작해보긴 했지만, 영화이기 때문에 권선징악 혹은 기승전결에 맞춰 아름답게 포장된 이 이야기들보다 더 날 것 그대로인 인간 감정을 알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유대인이었던 정신과 의사가 이 미친 상황을 버텨내며 깨달은 점을 집필한 이 책, <죽음의 수용소>는 최고의 책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도 말한다. 자신이 정신과 의사로서 직업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감정 상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그때의 일을 기억해내지도 못했을 거라고.
책을 읽으면서 가장 깊이 공감한 것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유롭게 사는 인생을 떠올리면 아무런 규제 없이 내 마음대로 하고 사는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함께 사는 세상에서 자유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나에겐 자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된다면, 그것을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의 막연한 자유의 정의에 대한 고민을 프랭클 박사는 자유의 ‘최소’ 범위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나의 고민을 간단하게 풀어주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는 있다는 것이다.
자유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
실제로 수용소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는 갇혀 있어야 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런데, 프랭클 박사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진정한 자유의 핵심이었다. 그럼 이렇게 자신의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이 있었을까?
프랭클 박사는 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어떤 가치를 붙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 가치의 핵심은 바로 ‘삶의 의미‘.
체인지 그라운드 영상 중에 전기사고로 눈, 코, 입이 다 녹아 얼굴이 사라진 남성이 있다. 하지만 치명적인 사고에도 이 남성은 자신이 살아야 할 강력한 한 가지 이유를 붙들고 있었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딸을 위해 17차례나 얼굴 이식 수술을 받았고, 그는 사고 전 보다 현재의 삶이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 남성의 삶이 우리에게 삶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재확인시켜주는 것 같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니체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이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며, 그와 동시에 요구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계속 성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 중에서
삶의 자유에 대한 정의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시련을 감당하고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태도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사람이 일단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하면,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에 대한 책임도 감내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일은 자연스럽게 시련을 감당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시련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대인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그곳만 나오면 행복할 것 같았지만, 마침내 자유가 실현되었을 때, 모든 것이 스스로 꿈꾸어 오던 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때 사람들이 느꼈던 것은? 절망감이었다. 몇 년 동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시련과 고난의 절대적인 한계까지 가보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직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게 된 것이다.
프랭클 박사가 이야기하는 것도 이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탈출하느냐 마느냐와 같은 우연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는 삶이라면 그건 전혀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삶이라고 말이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어떤 시험의 단계를 지나면 행복이 찾아올 것 같지만 사실 삶에서 시련은 끝이 없다. 수능만 보면, 대학만 붙으면, 취업만 하면, 결혼만 하면, 집만 사면... 각각의 순간적인 성취에 초첨을 맞춘다면 그 유무에 따라서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과 같다.
두 번째, 시련은 시련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어려운 상황 속에는 반드시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있다.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하고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진다면 (의미를 찾고 나의 태도를 결정한다면) 그 전의 삶에서 바라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거라고 확신한다. 내가 세 아이들을 키우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말이다.
프랭클 박사는 이후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크고 작은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그런데 왜 자살하지 않습니까?” 환자들이 어렵게 이유를 이야기하면, 프랭클 박사는 그 이유를 묶어서 하나의 확고한 형태를 갖춘 의미와 책임을 만들어 내어 치료를 하는데, 이 방법이 아주 효과적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사람이 일단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주기 때문이다.
내가 세 아들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자주 어떻게 셋이나 낳아서 키웠냐고 묻는다. 그것은 고통에 주목했을 때의 시선이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의미에 집중하면, 육아의 어려움은 감당할 만한 것으로, 책임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원망하고 비난할 것인가? 불평하고 후회할 것인가? 아니면 운명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바꿀 것인가. 결국,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행복을 결정한다. 그러면 나는 나의 자유를 제대로 누리고 있는가?
그 태도는 오로지 나만 결정할 수 있다. 그러면 상황은 창조적으로 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