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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사 Feb 25. 2020

기생충.. 그중에 누구도 '악의'는 없었다

그런데 비극은 왜 일어나는 걸까?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기생충>에는 악인(惡人)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지도 않는다) 주인공이 악인과 싸워서 물리치는 권선징악의 구조가 너무 익숙하다 보니 '악인이 없는데 비극이 일어난다'는 접근은 새로워 보인다.


최근 책 <신뢰의 법칙>을 읽으면서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는 '신뢰' 문제로 귀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기생충>이 허구이고, 여러 우연과 복잡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비극을 사람을 잘못 뽑아서라는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하기는 어렵겠지만 신뢰의 관점에서 영화를 짚어보고 싶어졌다. 기택(송강호)은 동익(이선균)을 죽이려고 그 집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누구도 악의는 없었다. 그런데 비극은 왜 일어났을까?


1) 신뢰성이 없는 사람들


책 <신뢰의 법칙>의 저자 데이비드 데스테노는 신뢰를 '선한 의도'와 '능력', 두 가지로 구분한다.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목표를 달성할 능력이 없거나, 능력이 있더라도 사람들을 속이거나 이용하는 경우 모두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기택의 가족은 후자에 가깝다. (그들이 자격증이나 학력을 위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선균 가족이 요구하던 능력을 충족했지만 선한 의도나 정직성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신뢰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는 모두 중요하다.

신뢰의 문제와 관련하여
정직성과 능력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
신뢰의 문제와 관련하여 정직성과 능력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 (출처: <신뢰의 법칙>, p.110)


2) 신뢰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사후 해석으로 보면 동익은 기택의 가족(혹은 그 이전의 가사도우미였던 문광 역의 이정은)을 신뢰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즉 이선균이 송강호를 믿었던 근거는 그것이 가짜였든지 진짜였든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당시 상황에서 미래의 신뢰성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시점에만 적용이 된다. 만약 문광이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동익의 가족이 캠핑을 가지 않았더라면, 그 날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기택의 가족은 여전히 자신들의 역할을 잘 수행하며 신뢰할 만한 사람들로 남았을지 모른다.


신뢰성과 관련하여 평판은 환상에 불과하다.

-<신뢰의 법칙>, 데이비드 데스테노

문제는 우리 모두가 과거의 평판을 통해 미래의 신뢰도를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을 너무 뿌리 깊게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정직하다는 평판을 얻었다면 사람들은 그가 앞으로도 정직하게 행동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반면, 한 번이라도 배신했다면 다시 배신할 확률이 높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뢰성에 대한 판단은 계속 어긋나고, 잘못된 결정이 반복된다.


<신뢰의 법칙>에서는 수많은 사례와 실험을 통해서 "한 사람의 신뢰성은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공중전화기 부스에 누군가가 두고 간 편지를 전화기에 동전이 남아있을 경우 (우표값이 있을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이 편지를 대신 부쳐줄 확률이 높아진다거나,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남을 도와줄 확률이 높아진다거나, 가짜 선글라스를 쓰는 것만으로도 거짓말을 하는 성향을 크게 높였다는 등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행동에 대한 수많은 실험들의 결과는 우연이 아니다.


물론 이미 형성된 평판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이유가 우리가 그 특성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거나 장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두 가지 마음의 메커니즘 사이에서 균형을 잡은 것이 관성을 유지하며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은 바뀌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갑자기 바꿀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외부 상황이 달라지거나, 보상이 달라지면 우리의 행동은 그에 따라 변화한다.


결국 신뢰성은 1) 선한 의도와 능력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고, 2)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신뢰성을 측정하는 데 좀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상대방이 선한 의도와 능력 모두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나의 직관이 틀릴 수도 있다고 의심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벤저스의 누구도 신뢰성을 측정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지만, 이 능력은 그 어떤 능력보다 거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게 되면 효율성은 증대되고 불필요한 감시는 사라진다. 데스테노가 말하는 것처럼 이 능력은 유리하게 조작한 주사위를 가지고 도박장에 들어서는 것과 같다.


최고의 결과를 만드는 비결= 직관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능력 (출처: <신뢰의 법칙>, 260p)


반대로 이렇게 신뢰성을 측정하는 잣대를 남이 아닌 나에게 적용해보자. 지금 배부른 상태에서 내일 아침을 먹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배가 고프다. 다이어트를 결심했으니 내일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더라도 내일 저녁에 맛있는 식사가 준비되었다면 쉽게 타협할 수 있다. 결국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는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내가 선한 의도와 능력이라는 신뢰성의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자. 스스로 점검하면서 겸손해질 수 있고, 메타인지도 높일 수 있다. 결국 신뢰의 문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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