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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쁘띠프렌 Jun 17. 2021

작가라는 이름

시도

작가라는 이름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가 은퇴 후 지낼 곳을 고민하던 중 평소 바다를 동경하는 남편은 강원도를 일 순위로 지명했다. 하지만 도시문화에 익숙한 나는 내키지 않았고 제주도에서 사계절을 지내자고 제시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신도시 모델하우스를 방문하고 부부 선호를 적절히 맞출 수 있을듯싶어 분양을 받았다. 분양을 받고 입주 날짜에 맞추려고 살던 아파트 매매를 진행했다. 3개월 전에 계획했던 여행 일자가 다가오고 집을 보러 다녀갔던 분이 흡족하다 해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다. 여행 떠나기 전 공항에서, 부동산 소장님이 그분과 매매가 성사됐다고 연락을 했다. 그녀는 새로 이사할 집터의 운기가 좋아 일사천리로 풀린다며 덕담을 했다. 미신이지만 왠지 이주하는 곳에서 정말 좋은 기운을 가져다줄 것만 같았다. 집 문제도 해결되어 기분도 좋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이사 후 예정됐던 일들이 순차적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아들은 복수전공을 이수하느라 반 학기를 더 거리상 먼 신촌까지 다니느라 힘들었어도 내색 한번 않고 졸업과 동시에 원하던 회사에 합격하고 원만히 독립을 이뤘다. 남편이 좋아하는 초록빛 푸른 바다는 아니어도 집 앞에 바다를 바라보며 거닐 수 있고 숲세권 공원도 내 집 마당처럼 누리며 산다는 게 좋았다. 한동안 깨끗하게 조성된 신도시의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애썼다.   

   

작년 봄이었다. 일 년이 지난 무렵부터 무료해진 일상을 탈피하고자 취미활동을 찾던 중 눈에 들어오는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을 했다. 우연히 참가하게 된 희곡 작가 수업. 내재되어있던 잠재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사춘기 시절. 여학생이라면 한 번쯤 문학소녀가 되어 감성을 표현해 본 경험이 있을듯싶다. 한 갬~성 자부했지만 나는 오랜 기간 작정하고 글을 쓰지 못했다.

     

첫 수업시간. 선생님은 두서없이 기획안을 만드는 과제를 내주셨다.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고 워드프로세서를 실행시켜 기획안 초안을 잡아본다. 하지만 첫 소절부터 막막하고 뭔가 떠오를 듯 잡히지 않았고 머리만 지끈거렸다. 주말 내내 붙잡고 있던 초안을 부랴부랴 작성 완료해서 기한 내에 제출했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였다. 희곡 형식에 관해 문외한인 사람이 억지로 글을 쓰려니 장황한 산문 글이 되었다. 그 와중에 첫 대면 수업 이후 전국이 코로나 19 감염으로 심각해지며 결국엔 비대면 수업 조치로 결정됐다. 온라인 수업으로 변경되며 봄에 시작되었던 수업은 여름을 지나 연말까지 이어졌다. 예상보다 긴 일정으로 심적 부담도 커졌고 중도 포기도 고려해 보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글 쓰는 일련의 과정에서 다섯 시간 넘게 꼬박 앉아 집중하는 나를 발견하고 적잖이 놀랐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은 휴일이면 간식도 챙기고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며 칭찬의 말로 격려했다. 은연중 마음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던 문구들이 알알이 영글어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글을 쓰는 내내 오롯이 내 마음에 귀 기울이게 되고 글자 한 자 한 자를 보듬어 다듬기 시작했다. 쓰고 지우 고를 여러 번. 반복되는 퇴고 작업을 거치며 마침내 15분 단막극 대본을 완성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본 성취감. 잔잔한 일상에 활기를 되찾아 주고 보상을 해 준 것 같아 스스로가 대견하고 뿌듯했다. 책 만들기 전 편집 과정에서 규격에 맞는 수정 작업을 한 번 더 거치며 심혈을 기울였다. 관심 가는 대상을 찾고 몰입하는 시간을 가져본 지 얼마만 인가! 그렇게 인생의 첫 작품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내게로 왔다.    

  

                                                “ 작가님, 축. 하. 해. 요.”


「시도」   


 자발적 고립을 선택해서 얻은 일상의 여유로움도 한때이고 돌연 나태함으로 변이 되고 퇴보하는 건 아닐까 자문하며 조급함이 밀려온다. 한 달에 두 번 집에 오는 아들이 가끔 만나는 엄마 모습에서 예전과는 다르게 활기를 잃어간다고 느꼈는지 유용한 사이트 몇 개를 알려 준다.

“어머니, 필요하신 책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주문해 드릴게요.”

며칠 후 아들이 보내온 택배 상자를 열어보니 근래 유명하다는 작가들의 신간 서적들이다. 퓰리처 수상작인 ‘총, 균, 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 토니 로빈스의 ‘Money’

“ 흠~ 책 두께가 만만치 않구먼 ”

두꺼운 책 부피에 압도되며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첫 장을 펼쳐 본다.    


  

시도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내가 말하고 있다고 믿는 것,

내가 말하는 것,

그대가 듣고 싶어 하는 것,

그대가 듣고 있다고 믿는 것,

그대가 듣는 것,

그대가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

그대가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것,

그대가 이해하는 것,

 내 생각과 그대의 이해 사이에 이렇게 열 가지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의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시도를 해야 한다.

                                - 상상력 사전       



첫 문구에 사로잡혀 단숨에 책장을 넘기며 소파에 자리를 잡는다. 펜 하나로 사람을 매혹시키는 언어의 마술사 ‘작가’ 참 매력 있다. 아 참! 요즘은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는 마법의 손가락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시계를 보니 저녁 할 시간. 부스스 일어나 분주히 움직여 본다.           



 터닝포인트     


여고 1학년 때만 해도 문예반 친구들과 한주에 책 한 권을 읽고 토론하며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켰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대학입시 준비로 모임 횟수는 줄고 자연스레 모임은 폐지됐다. 그 후 감수성 예민한 문학소녀는 어린 시절 잠시 동경했던 작가 지망생의 꿈을 잊고 지냈다. 오십이 되던 해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타지에서 주는 외로움에 끄적거림은 시작되고 기록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이야기가 되어 내 기억의 보물 상자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때 잠시 머물던 열정을 꽉 붙잡고 적극적으로 변화를 시도했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더 성장했을까. 거두절미하고 지금이 아닌 ‘내일의 나’에 시선을 돌려 용기를 가져 볼 때다.



▶ ‘Turning Point’

사전적 의미는 어떤 상황이 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뀌게 되는 계기. 또는 그 지점.   

        


☕ The cafe     


오랜만에 친구와 점심 약속을 하고 만났다. 대화 도중에 내가 쓴 글이 궁금하다며 보여달라는 말에 머뭇거리다 핸드폰 파일 속 대본을 보여줬다. 친구가 대본을 읽는 동안 나는 멋쩍음을 뒤로하고 조각 케이크와 커피를 시키러 1F 매장으로 내려갔다.

‘다 읽었겠지?’

주문한 커피와 케이크를 들고 2F으로 올라오니 기다렸다는 듯 칭찬이 앞선다.

“정말 처음 써 본 거야? 이런 재주가 있다니 놀라운걸?”

“좋게 봐주니 기분이 좋구먼! 훗”

주변 반응과는 다르게 아직은 습작 수준에 불과해서 독자를 의식하거나 취향을 고려할 만큼 글의 수준은 높지 않다. 사물을 멀리서 바라볼 때와 가까이서 바라볼 때 다르듯이 글쓰기도 그렇다. 막상 시작해 보니 시간적 여유와 건강도 허락해야 하고 취미 삼아 편하게 글을 쓸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무엇보다 ‘작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무게를 지탱하고 감당할 수 있는 내공을 쌓는 것이 관건이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글 읽어 보니 어때요?”

“괜찮은 편이지.”

넌지시 묻는 말에 남편은 미사여구 없이 간단히 답한다.

“뭐지?!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말은?”

바로 ‘답 정 너’  

         

「작가라는 이름」     


막상 희곡 수업시간에 이름 끝에 불리는 작가님이란 호칭이 내겐 영 어색하고 낯간지러워 거론조차 하지 못했다.      


「언제나 나는 근사한 누군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문제는 그 바람이 좀 더 구체적이어야 했다는 점이다.」

                                                                                                                      - Lily Tomlin -      


코로나 사태로 시작된 끄적거림은 새로운 도전을 의미했고 결과는 놀라웠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2020년 힘든 가운데 알차게 마무리하며 어렵게 얻은 작은 결실을 바탕으로 2021년 한 발짝 도약의 시간으로 만나고 싶었다. 언젠가 삶의 여정을 마치고 떠날 때 반추해 본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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