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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겠습니다 上

장기 근속자가 많은 회사에 속지 마라

by 섬섬옥수


세상에는 입 밖으로 뱉기 영 어려운 말이 몇 가지 있다. 대부분이 관계를 시작하거나 맺는말들이다. 연애감정을 고백하는 말, 그리고 이어오던 연애를 종결짓는 말. 연애 못지않게 많은 사람과 관계를 축적해 나가는 것이 회사이고 사회생활이다. 연애가 한 사람과의 오롯한 관계 형성이라면 회사는 조금 더 규모가 크다. 내 발언 하나, 행동 하나에 영향을 받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아마 그래서일 테다. 많은 사람들이 품 속에 가슴에 퇴직서를 품으면서도 부득부득 출근하는 이유가.

그리고 나는 얼마 전, 드디어 말을 꺼냈다.


앞으로 함께 일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 퇴사다.






막연하게 입사를 준비하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문구가 있다. '다년간 장기근속하는 직원들이 많은 안정적인 직장'. 정말 돈이나 직장이 급하거나 여유가 없을 때야 확인하지 않는다지만, 대부분의 구직자들은 회사 소개나 회사의 금전적인 상태 등을 확인한다. 근래 들어 더 많은 구직자들이 확인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회사의, 소위 말해 '회전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사를 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퇴사를 하는지.

본능적으로 퇴사율이 높은 회사는 꺼리게 된다. 그만큼 사람을 갈아 넣는 회사라고 보면 쉽다. 아무리 돈이 급하다 하더라도 믹서기에 들어가 스스로를 갈아버릴 이유는 없진 않는가. 그렇다고 '가족 같은 회사'라는 워딩을 사용하는 곳은 또 피하고 싶다. 야근과 주말근무, 상사의 뒤치다꺼리까지. 자칫하단 정말 가족보다 회사 동료를 더 오래 보는 불상사가 터져버릴 것만 같으니.


결국 구직자가 혹하는 것은 '다년간 장기근속하는 직원들이 많은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문구다. 사실상 회전율이 높은 회사나, 가족 같은 회사를 운운하는 회사보다 꽤 매력적인 건 부정할 수 없다. 몇 달 전의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 누군가 같은 질문을 내게 한다면 첫 대답은 '글쎄'다.


그런 회사가 있다.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일은 굉장히 열심히 했는데, 돌이켜보면 내가 무얼 한 거지? 하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는. 대체로 사업의 분야가 마이너(minor)하거나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겉으로 드러나는 작업보다는 물밑작업이 더 많은 곳이 그렇다.

그 회사에서는 굉장히 중대한 작업이고 회사를 살리는 움직임이지만, 대외적으로 보았을 때는 그저 일반적인 업무일 뿐이다. 경력을 쌓아도 물 경력이 된다. 자신의 경력이 물 경력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면, 빠르게 발을 빼는 게 맞지 싶다. 나중에 경력직으로 이직을 하고 싶어 지더라도, 물 경력으로 설득할 수 있는 회사는 몇 없으므로.


이직할 수 있는 회사 중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 결국 빙빙 돌다 퇴사하려던 회사로 다시 주저앉는 경우가 주변에도 심심찮게 있다.

그렇게, 원치 않고 계획에도 없었던 장기 근속자가 된다.

그렇게 장기 근속자가 된다라니,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인가. 같은 문장 구조를 취한 제목을 가진 일본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감동적 이기라도 하지.


예전이라면 당연했을 일들이 당연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불만사항을 토로하지 못한 채 무조건 참고 근속하는 게 약지 못한 행동이 되는 시대이다. 가족 같은 회사를 표방하는 곳은 여전히 많다지만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다. 내가 설렁설렁 일해도 이유 없이 품고 가는 회사가 없다는 사실을. 회사들도 바뀌고 있다. 커리어를 쌓을 수 없고 적절한 대우를 받을 수 없는 회사에 끝까지 의리로 남아있을 사원은 없다는 사실을, 다들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기에 변화와 혁신에 목숨을 건다.

어찌 보면 이리도 비정한 사회일 수가 없다. 이따금 숨이 턱턱 막혀올 정도로. 정이 많고 서글서글한 사회를 바란다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한 번 한숨을 길게 내쉬곤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단순히 정과 의리로 한 회사에 몇 년 몇십 년이고 남아있을 수 있냐고 내게 묻는다면, 해줄 대답이 없어 처연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가 다니던 회사는 워라밸 (Work-life-balance)을 잘 챙겨주고,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회사였냐고? 글을 여기까지 읽다 보면 자연히 품게 될 질문이지 않은가. 대답은 당연하다는 듯 NO다. 잘한다, 열심히 한다. 원하는 모양대로 일을 딱딱 만들어낸다. 칭찬에 춤추는 고래처럼 바삐 살아오다 멀찍이서 나를 보았다.

다른 회사도 당연히 다 하는 걸 뭘 그렇게 대단하다는 듯 꾸며대고 있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기분이 이럴까. 이렇게 있다가는 원치 않던 장기 근속자가 된다.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쓸 수가 없어 결국 같은 자리를 도는 쓸모없는 체스 말이 되고 만다. 사람이 너무 좋았나? 내가 빠지면 이 회사는 잘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허울 좋은 연민만 늘어놓고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커리어로 인정받을지조차 미지수인 궂은일들로 내 몸과 건강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는데. 대책 없는 퇴사와 돈 없는 백수생활을 이어나갈 용기는 없었다. 공백기를 길게 가져 다음번 면접에서 '공백기엔 무얼 하셨나요?'같은 질문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여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바빠져야만 했다.

쓸만한 커리어를 건지고, 빠져있던 프로젝트들을 채워서 포트폴리오를 살리고. 틈틈이 여행 계획도 세웠다. 딱 한 달. 한 달만 짧고 굵게 쉬고 다른 회사에서 일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퇴근 후고 주말이고 달렸다. 그러고서야 수줍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퇴사에 관한 속 시원한 한마디를.


회사에 죽어버린 눈빛으로 시키는 업무만 묵묵히 하는 사람이 유독 많은가.

장기 근속자가 많고 안정적이라고 부장님은 매번 강조하지만, 그 외의 특출 난 비전은 찾지 못하겠는가.

회사가 고였다는 생각은 드는데,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모르는 사이 스스로가 같이 고여버렸나.


결정은 결국 자신의 몫이니 제삼자의 입장에서 가타부타 논할 계제는 아니지만, 2021년의 절반을 달려온 하프타임의 지금. 한 번쯤 돌아보아도 괜찮은 시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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