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족은 집에 있어요
작년 이맘때쯤, 샛별처럼 등장하여 직장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노래가 있다. 둘째 이모 김다비, 개그맨 김신영 씨의 《주라 주라》다. 구절구절마다 공감 가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아 나 역시 유튜브가 켜진 휴대폰을 들고 달려가 엄마에게 들려드렸던 적이 있다.
가족이라 하지 마이소
내 가족은 집에 있어요
이제 막 60대에 접어든 아빠와, 50대의 끝자락을 보내고 계신 엄마. 그리고 나까지.
우리 가족은 흔치 않게 가족 구성원 전부가 일을 한다. 노래를 들었던 당시의 엄마가 어떠셨더라. 아마,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깔깔 웃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몸담고 있던 회사는 작은 기업이었고, 회사의 임원들은 경영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랑곳 않았다. 좋은 회사에 가는 것보다, 어디에 가도 내가 좋은 영향력을 미치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회사에 미션이 부족하면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나가면 된다. 비전을 활자로 표현할 수가 없다면 내가 그 역할을 해주면 된다.
걸음마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처럼, 불안정하고 종종 비틀거리는 걸음이었지만 사측에서는 나중에 스톡 옵션으로 보상하겠노라 선언했다. 대체 불가능한 멤버가 되기 위해 나는 사람 공부를 했다. 성장하는 기업의 CEO들은 어떤 마인드로 어떻게 일해왔는지, 옆에서 함께 뛰던 초창기 멤버들은 어떻게 중심을 지켜왔는지.
은연중에 나는 꿈꾸었던 것 같다. 쿠팡, 마켓 컬리, 배달의 민족. 성공한 스타트업의 일례로 일컬어지곤 하는 기업의 초창기 멤버이자 중역인 사람처럼 되기를. 욕심을 냈다. 루틴적인 기본 업무로 입사했으나 저녁마다 주말마다 공부를 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발을 벗고 나섰고 몇 번의 성과를 거둔 후엔 사측에서 먼저 나를 부르기도 했다. 워라밸이 무너질 때마다 울화는 치솟았고 이를 악물었으나 견딜만하다 생각했다.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 회사는 내 직책을 올려주었다.
필요 이상의 열심은 결국 열정 페이라는 것 정돈 알고 있었다. 그래도 회사와 함께 성장하면 만족이었다. 그래, 열정 가득하던 나는 장기근속자를 꿈꾸었다.
장기근속자를 꿈꾸었던 일원이 왜 자리를 마다하고 '장기 근속자의 인원수에 속지 마라'라고 하는 퇴사자가 되었냐고? 이유는 '사람'에 있었다. 사실 일을 그만 둘 개연성은 차곡차곡 쌓여오고 있었다. 회사는 사람을 내보내는 일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이 회사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생리적 · 안전 욕구가 우선 해결되어야 소속이라던가 존중, 자아실현의 욕구를 꿈꾸는 인간 개체와 기업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단 회사가 사는 것이 먼저다. 매출이 꾸준히 나오고, 리스크 관리를 안정적으로 하고. 회사가 어느 정도 튼튼한 궤도에 올라탄 후에 임원은 사원을 돌아본다. 이따금, 그 인고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 직원들의 불만과 애로사항이 터져 나오면 사원 복지가 조금 더 일찍 논의되기도 하지만.
회사가 꿈의 직장처럼 사원 복지를 챙기기엔 이른 단계였고, 사원들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켜줄 수 없으니 내보내는 것이 최선책이었을 테다.
0.5인분을 감당하는 사람 여덟을 뽑아놓는 것보다, 4인분을 하는 사람 하나를 임금을 더 많이 주고 뽑는 게 낫단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다. 경영자로선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딱히 틀린 부분도 없다. 회사란 이익을 위해 생긴 집단이며 이윤 창출이 제1의 목표이니, 비효율은 최소화하되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업무를 보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렇게 판단했다.
그래서, 전에 몇몇 사원이 퇴사 의사를 밝히고 사측이 그 서류를 수리하였을 때 관망했다. 그들의 평소 직무 능력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전체가 아닌 일부분에 꽂히는 바람에 시간을 많이 쓰며 작업하는 이도 있었고, 개인의 성향이 너무 짙어 대중성을 캐치하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업무상 절차를 늘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선에서 작업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일이 늘어나면서도 나는 기뻐했다. 많은 일을 처리하면서 분명 배우는 것이 있고, 얻는 것이 있겠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새로운 입사 지원자는 줄어만 갔다.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회사의 일원이었던 사원이 사회로 돌아가면 소비자가 된다. 하다못해 입사 면접 하나만 보고도 후기를 작성하는 시대이다. 임원이 절대적인 자리에 앉아 사원이며 입사 지원자를 판단하는 시기는 애저녁에 지난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각자의 잣대로 저울질한다.
아니나 다를까. 모 취업 관련 사이트에 버젓이 면접 후기가 올라 있었다. 얼핏 보면 회사를 칭찬하는 듯 무난해 보였으나 미묘한 구석에서 '이 회사, 이런 곳이니 가지 마세요' 하고 어필하는 부분이 있었다. 자세히, 오래 보아야 사물의 본질을 안다고 누가 그랬던가. 그 말 그대로였다. 후기는 영리하게도 어중간한 어조를 띄고 있었다.
제한된 인력으로 굴러갈지도 모르는 회사에서, 냉정히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자금력이 많이 모자란 곳은 아니었으나 신중함이 지나쳐 마케팅에 적절히 활용되지 않고 있었다. 브랜딩이며 콘텐츠며 이것저것 준비해 양 손에 가득 차도록 들고 서 있어도 계획만큼 집행이 되지 않으니 자꾸만 손 바깥으로 흘러넘치기만 했다. 시쳇말로 금방 쪽박 찰 회사냐 묻는다면 그는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특출 난 워라밸이나 비전이 돋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판단을 마치고 나니, 내 커리어가 물 경력 일까 두려워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일을 하며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는데, 바로 몸 건강이었다. 스물다섯부턴 노화가 시작되니 피부던 몸이던 관리를 꾸준히 해줘야 해. 20대 초반, 너 덧살 터울인 아는 언니가 했던 말을 잊은 업보다. 체력이 예전만 하지 않았다. 건강이 무너져 필사적인 대책이 마련한 상황에서, 흔히 듣던 이야기가 날카롭게 꽂히는 건 예정된 일이었다.
회사는 여러분을 가족같이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그 누가 가족과의 결별을 사소한 소일거리 처리하듯 하던가. 가족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지만 그건 어떠한 형태의 가족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차라리, '우리는 일로 만난 사이이니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도록 노력해 주세요.' 하는 잔소리였다면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이미 지난 일에 질문을 던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고, '사람'을 쉽게 생각하는 기업이 사람을 잃는 건 당연한 순서다.
그러나 사실상, 사람을 쉽게 생각하지 않는 기업은 흔치 않다. 스타트업은 사원의 복지에 투자할만한 자금이 부족해서, 대기업은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입사하고자 하는 인원이 많아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기업을 찾는 일은 별을 따는 것처럼 멀고도 어려운 일이건만, 몇 안 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기업은 그 기업의 가치를 알아본 인파로 이미 러브콜이 넘친다.
되지도 않는 로망과 꿈으로 퇴사를 결정한 것이냐 물으면 그에 대한 대답은 고민 없이 NO라고 대답하겠다.
퇴직서를 내고, 같은 대학을 나와 대학원에 진학한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언니 너무 대단해요. 어떻게 그 힘든 말을 꺼냈어요? 이제 푹 쉬시는 거네요. 여행도 가고요. 아는 남동생은 그러더라. 누나, 드디어 퇴사한 거예요? 마치 내가 퇴사할 걸 알았다는 듯이. 저였다면 진즉에 때려치웠을 거라는 첨언도 함께 돌아왔다.
그렇다. 모두가 힘든 요즈음, 우상시되는 것은 '일을 그만둘 용기'이곤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직 회사에 몸담고 있던 시절, 다른 직원들이 퇴사하는 것을 관망하면서도 마음 한 켠으로 부러워는 했으니.
그러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들에게. 매일 새벽 덜 깬 눈으로 화장을 찍어 바르고, 각양각색의 넥타이로 목을 조여내는 직장인에게. 상사의 잔심부름에 진땀을 빼곤 탕비실에 가서야 숨을 내어쉬는 이들에게. 야근에 찌들어 밤늦게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조는 영혼들에게. 힘겨운 일상을 버텨내는 것도, 업무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도 하나의 용기임을 말하고 싶다.
그래도, 출근길에 오르자마자 퇴근하고 싶어지는 자신과 매일같이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지 않는가.
그만두고 싶은 '나'와 싸워 이기는 용기를, 일을 그만두겠노라 선언한 내가 논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나 역시 재충전의 시간만 가지고 일터로 돌아갈 생각이다. 업무를 계속 이어나갈 용기는, 업무를 그만둘 용기보다 더 크고 중요하니까. 무엇보다 내 통장을 통통하게 불려주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오늘도 일터에서 집으로, 집에서 일터로 향하는 발걸음들을 멀리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