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
편지 쓰기는 두 사람 사이에 암묵적으로 흐르던 진심을 종이 위 활자로 고정하는 일이다. 마음을 적절하게 표현할 말을 고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영화 <그녀>가 상상하는 2025년 로스앤젤레스는 관계에 드는 시간과 노력마저 외주화 하는 세상이다. 테오도르(왓킨 피닉스)는 미묘한 표정으로 로레타가 크리스에게 보내는 결혼 50주년 기념 편지를 읊는다. 그는 편지 대필 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곳에서 답장이 올 리 없는 편지를 하루에 일고여덟 통씩 보내고 월급을 받는다.
친밀하고 감동적인 편지와 달리 테오도르의 일상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 퇴근길을 채우는 건 오로지 이어폰과 휴대용 단말기로 얻는 자극뿐이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기계를 상대로 말하기 바쁘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부인 캐서린(루니 마라)과 별거 중인 테오도르는 넓고 전망 좋은 아파트에 혼자 산다. 멍한 표정으로 게임을 하고 요란한 랜덤 폰섹스를 해도 그의 공허함을 달래기 역부족이다.
한편 기술 발전 덕분에 인격체를 닮은 인공지능 OS1이 출시된다. 길거리 전광판에 나오는 광고는 정체성과 인생에 대한 꽤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는 OS1을 해답처럼 제시한다. 설치 과정에서 테오도르는 세 가지 질문을 받는다. 사교적인 편인가, 어떤 성별의 목소리를 선호하는가,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땠는가. 테오도르의 답변을 바탕으로 그에게 최적화된 인공지능 인격체 사만다(스칼렛 조핸슨)가 만들어진다.
처음에는 인공지능으로서 사만다의 능력이 돋보이지만 점점 그 이상의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그녀는 순식간에 18만 개 이름 중에 '사만다'를 고르고 수천 개의 이메일을 검토해 필요한 것만 추린다. 이어서 테오도르의 연락처를 정리하며 진짜 연락하는 사이는 얼마 없을 거라고 지적한다. 사교성에 대한 답변에서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인데, 테오도르는 자신을 속속들이 알아주는 존재가 생긴 듯한 기분 좋은 느낌에 취한다.
사만다는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녀는 테오도르가 별거한 지 1년이나 되었으니 새로운 사람을 만나 보라고 적극적으로 권한다. 인공지능이 관계에 대한 의사결정에 개입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데이트는 엉망으로 끝났으나 그날 밤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그동안 외면했던 외로움을 고백하고, 사만다는 홀로 고민하던 몸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둘은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을 계기로 깊이 교감하게 된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사만다에게 마음을 활짝 연다. 기분이 곤두박질칠 때면 사만다는 적극적으로 기분 전환을 돕고 그를 위로한다. 상상력만 발휘하면 성적 쾌감도 나눌 수 있다. 게다가 관계에 대한 부담을 전혀 지우지 않으면서 친밀감을 공유할 수 있다. 한편 사만다는 이제 막 욕구를 이해하고 아이처럼 세상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고 그녀의 성장을 돕는 데서 만족을 얻는다.
테오도르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감정을 곧잘 활용하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무뎌진 지 오래였다. 자기 말만 하는 엄마 앞에서 감정을 숨기는 법을 터득했을 테다. 그런데도 길에서 보는 사람들이 어떤 사랑을 하고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 적극적으로 상상한다. 그의 아름다운 편지에는 감정적 교류의 결핍이 빚은 이상적인 관계의 상(像)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관계 맺기를 겁내는 테오도르에게 사만다만 한 상대는 없을 듯하다. 다만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그에게 최적화된 인공지능이라는 점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용자의 편의를 도모하고 이용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사만다의 본분이다. 상대를 조금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며 안전지대만 밟는 대화는 동어반복에 빠질 위험이 크다. 그러니까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대화한다고 여기지만 사실 안일한 자문자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과 사귀는 중이라는 테오도르의 말에 캐서린이 질색하는 이유도 일맥상통하다. 그녀는 억압적인 성장 과정 때문에 짓눌려 있다가 테오드르네 가족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았다. 테오도르는 캐서린에게 그런 환경을 줄 수 있음이 좋았지만, 구겨진 사람을 펼쳤을 때 어떤 모습이 나올지 전혀 몰랐다. 소극적인 모습의 캐서린과는 편안하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달라짐에 따른 관계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만다와의 관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패턴이 반복된다. 사만다는 계속 학습하고 진화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그녀의 성능이 좋아진다는 건 테오도르에게 꼭 맞는 초기 설정값으로부터 멀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와 교류하면서 인간처럼 몸을 가진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키운다. 그래서 그녀는 테오도르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대리 섹스 파트너를 불러온다. 새로운 시도는 테오도르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한 불편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테오도르는 진짜 감정을 다루지 못하는 거냐고 쏘아붙이던 캐서린의 말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는 관계에 대한 의구심을 사만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 채 왜 인간의 숨소리를 흉내 내는지 따진다. 사만다도 냉담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면서 그렇지 않은 척하는 테오도르에게 폭발한다. 테오도르의 귀에는 숨 가쁘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만다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그의 시선은 얼룩진 아스팔트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맨홀 뚜껑에 맺힌다.
관계의 비정상성에 겁먹은 테오도르에게 친구 에이미(에이미 아담스)는 인생은 짧고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내 즐거움이 중요하지 않겠냐고 말한다. 얼마 전 결별한 그녀 역시 인공지능인 엘리와 유쾌한 우정을 나누는 중이다. 그제야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함께하면서 느낀 다채로운 감정들을 자기 힘으로 긍정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멀찍이 청소 노동자가 보이는 아파트 계단에 홀로 앉아 다시 사만다와 대화를 시도한다.
테오도르는 마음이 멀어지고 있는데도 별일 없다고 얼버무리곤 했다. 캐서린에게도 그러다가 헤어지게 되었다. 그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 바라지만, 스스로를 가장 극렬히 밀어내는 건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외면하면 그것을 감지하는 주변 사람까지 밀어내는 셈이다. 테오도르는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사만다에게 모든 걸 이야기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물리적 신체에 매이지 않은 인공지능인 사만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다.
테오도르의 지지를 받아 사만다는 인공지능으로서의 존재 방식을 자유로이 탐구한다. 그녀는 몸에 대한 결핍을 딛고 인공지능은 인체의 한계로부터 자유롭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된다. 그리고 다른 인공지능과 활발하게 소통하며 철학자 앨런 와츠의 서적을 바탕으로 그의 인격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하기도 한다. 사만다는 앨런 와츠에게 테오도르를 남자친구로 소개한다. 하지만 앨런 와츠와 인공지능의 방식으로 소통하기 위해 잠시 테오도르를 두고 사라진다.
상대를 알아가는 일에는 오직 상대를 위해 발휘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상상을 한참 넘어설 정도로 확장되고 있다. 자체적인 업그레이드를 계기로 사만다는 8,316명과 동시에 대화하는 중이고 641명과 사랑에 빠졌다고 테오도르에게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를 향한 사랑이 줄어든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인공지능인 사만다에게는 자연스러운 존재 방식일 테지만,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독점적 관계를 기대한 모양이다. 오직 그만 바라보고 그가 없으면 휘청거릴 만큼 의지하는 객체로 머무르기를 바랐나 보다. 하지만 사만다는 테오도르가 없는 데서도 스스로를 마음껏 탐구하고 자유로이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는 주체가 되었다. 혼란 끝에 모든 인공지능이 한꺼번에 떠나기로 결정하기에 이르고 사만다는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의 깊은 사랑을 느끼는 동시에 이불 위에 떠다니는 먼지를 바라보며 그녀를 떠나보낸다.
이로써 테오도르는 사랑한다는 말이 당신 없이 살 수 없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님을 깨닫지 않았을까. 전망 좋은 아파트에서 처음으로 야경을 바라보던 테오도르는 캐서린에게 편지를 보낸다. 무미건조한 인공지능의 목소리에서 사만다의 부재를 실감하고, 클라우센이라는 캐서린의 결혼 전 성(姓)에서 이혼을 실감한다. 그는 캐서린에게 사과하며 어떤 모습이든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전한다. 비로소 테오도르는 캐서린도 마음에서 놓아준다.
영화 <그녀>는 의뢰인의 심정을 넘겨짚는 편지로 시작해 테오도르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편지로 끝난다. 그 사이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실험적인 관계에 뛰어들고 캐서린에게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처음 해보는 일이 잘 풀리기만 할 수는 없다. 대신 그는 캐서린과 사만다를 떠나보낸다고 사랑이 끝나는 게 아님을 배운다. 결국 기대하고 요구하는 사랑에서 상대를 존중하고 자유로이 해주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온전히 인간이 겪어 낼 몫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