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
모든 것은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도로명 표지판에서 시작되었다. 데이빗 린치 감독에 따르면 작은 아이디어가 발전해 한 편의 이야기가 되었고, 이야기 속의 인물이 만들어지면서 구체적인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달리면 산타 모니카 산맥과 할리우드를 동시에 볼 수 있다. 낮과 밤의 풍경이 사뭇 다르게 다가오는 그 도로처럼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도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는 세 가지 현실을 뒤섞으며 시작한다. 선명한 보라색 배경 위로 춤 대회 경연자들의 현란한 움직임과 그림자가 뒤섞인다. 대회 우승자로 보이는 여자가 환하게 웃고 그녀 곁에 노부부가 선다. 환한 빛은 깜깜한 방으로 전환된다. 그곳에 누군가 붉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잠들어 있다. 그리고 또 한 번 전환이 일어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갑자기 자동차 사고가 일어난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머리를 다친 채 휘청거리며 도로를 벗어나 할리우드로 걸어간다.
주택가로 내려온 여자는 이상하게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그녀는 어느 집 현관에서 잠들었다가 일어나고, 마침 멀리 떠나는 중년 여성의 집에 숨어든다. 그곳은 영화배우의 꿈을 품고 로스앤젤레스에 온 베티(나오미 왓츠)가 머물기로 한 곳이다. 베티가 이름을 묻자 그녀는 리타 헤이워스의 영화 포스터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리고 스스로를 리타(로라 해링)라고 소개한다. 두 사람은 리타의 가방에서 돈뭉치와 새파란 세모꼴 열쇠를 발견한다.
베티와 리타는 서로를 만나도록 운명 지어져 있었던 듯하다. 베티와 리타가 함께 지낼 그 집은 원래 베티의 고모가 사는 곳이다. 베티는 고모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좋은 집에 머무를 수 없을 거라고 감탄한다. 크고 아름다운 집에 위축된 베티는 먼저 집에 들어와 있던 리타를 침입자라고 감히 생각하지 못한다. 기억을 잃은 리타도 알을 깨고 나온 아기 새가 처음 만난 존재를 엄마라고 여기는 것처럼 베티에게 모든 걸 의지한다.
뒤이어 관련 없어 보이는 세 남자의 현실이 교차한다. 윙키스라는 식당에서 댄(패트릭 피슬러)은 악몽이 현실이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는 식당 뒤에서 꿈에서 보았던 끔찍한 형상을 보고 겁에 질려서 의식을 잃는다. 영화감독 아담 케셔(저스틴 서로우)는 주연 배우 캐스팅을 두고 외압을 받는 데다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 집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어느 낡은 건물에서 조(마크 펠레그리노)는 전화번호부를 훔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세 사람을 죽이고 달아난다.
한편 베티는 리타를 위해 적극적으로 조사에 나선다. 윙키스에서 그녀는 신문에 교통사고 소식이 실렸는지 확인하고 경찰서에 전화해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사고가 났는지 확인한다. 리타가 식당 종업원의 명찰을 보고 다이앤 셀윈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내자 베티는 전화번호부를 뒤진다. 그리고 예정된 오디션을 성공적으로 치른 베티는 아담 케셔를 소개받기 직전 리타를 떠올리고 황급히 돌아온다. 두 사람은 함께 다이앤 셀윈의 집으로 간다.
여기까지 오면서 삶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는 대사가 두 번 나온다. 집주인 코코(앤 밀러)는 낯선 침입자를 감추는 베티에게 선의일지라도 거짓을 꾸며내서는 안 되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단단히 이른다. 카우보이(몬티 몽고메리)는 캐스팅 결정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아담 케셔에게 태도가 삶의 양태를 결정한다는 말에 동의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건방진 태도를 내려놓고 캐스티글리아니 형제가 점찍은 배우 카밀라 로즈(멜리사 조지)를 캐스팅하라고 경고한다.
베티와 아담 케셔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경고받은 사안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하는 때다. 아담 케셔는 그의 영화 <실비아 노스 스토리>의 주연 배우 오디션을 진행 중이다. 카밀라 로즈가 노래를 부르자 그는 무력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이 여자야'라고 말한다. 반면 베티는 장래가 촉망받는 감독과 친분을 쌓기를 포기하고 리타에게 달려간다. 그녀의 자의식은 리타를 돕는 역할에서 깨어나기를 거부한다.
베티는 선의가 모든 걸 정당화한다고 믿는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베티에게 쏟아지던 새하얀 빛은 베티의 과도한 낙천성을 시각화한다. 그녀는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해맑고 선하기만 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여행길에 만난 노부부가 그녀와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헤어지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상상조차 못 한다. 또한 낯선 침입자 리타를 전혀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녀를 돕는 일이 영화 같을 거라고 들뜬다.
기억도 정체성도 없는 리타는 베티에게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베티와 리타는 다이앤 셀윈의 집에서 시체를 발견한다. 그들은 지워진 기억의 자리에 리타가 다이앤 셀윈을 살해하고 도망다니는 중이라는 추측을 끼워 넣는다. 경찰서에 가는 대신 베티는 리타에게 자신과 같은 금발 가발을 씌워 아무도 그녀를 못 알아보게 만든다. 리타의 물리적·정신적 안위가 전적으로 베티에게 맡겨진 그날 밤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눈다. 그렇게 리타의 존재는 베티에게 흡수되어 버린다.
'실렌시오, 노 아이 반다(침묵, 밴드는 없다)'를 외치며 잠에서 깬 리타는 새벽 2시에 베티를 재촉해 클럽 실렌시오에 간다. 금발 가발을 쓴 리타와 금발 머리 베티가 객석에 나란히 앉는다. 트럼펫 연주와 가수 레베카 델 리오의 노래는 모두 테이프 녹음을 재생한 것이었다. 공연 진행자는 모든 것이 환상이라고 외친다. 베티는 경련을 일으킨다. 그러다 베티의 가방에서 새파란 정육면체 상자를 발견하고 베티와 리타는 황급히 클럽을 나선다.
집에 도착해 리타가 새파란 열쇠를 꺼내자 베티가 사라지고, 새파란 상자가 열리자 리타도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다. 이때까지 그저 환상에 불과했던 것인가? 연주자의 몸짓과 재생되는 소리의 싱크가 어긋나기 전까지 라이브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관객은 기억을 잃은 리타와 영화배우를 꿈꾸는 베티를 목격하는 동안 일단 현실이라고 믿었다. 그러다 앞뒤에 배치된 다른 힌트를 바탕으로 '생각'을 시작할 때 다른 가능성을 점치게 된다.
당혹스러운 가운데 오프닝에서 보았던 깜깜한 방에서 영화가 새로 시작된다. 베티의 얼굴을 한 다이앤 셀윈이 깨어난다. 성공적이지 못한 배우인 그녀는 리타와 생김새가 같은 카밀라 로즈와의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해 피폐한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위치한 아담 케셔의 집에서 파티가 열리고 카밀라는 다이앤을 초대한다. 그곳에서 아담 케셔와 카밀라는 결혼을 발표한다. 분노와 증오에 휩싸인 다이앤은 윙키스에서 청부 살인 업자 조에게 카밀라의 사진을 넘긴다.
베티와 리타가 찾아간 사람의 이름이 다이앤 셀윈이었다. 앞서 카밀라 로즈였던 여자가 파티에서 카밀라에게 키스를 하고, 윙키스 종업원의 이름은 베티로 바뀌어 있다. 다이앤은 카밀라의 도움 없이 영화에 출연하기 어려운 처지인 반면, 카밀라는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미모로 주인공 자리를 꿰찬다. 영화감독 아담 케셔는 앞에서와 달리 수영장 딸린 집을 뺏기지 않은 채 잘나가는 여배우와 재혼을 발표한다. 집주인 코코는 아담 케셔의 어머니로 등장하고, 카우보이는 아담 케셔의 집 복도를 지나간다.
이제 아귀가 맞아 드는 지점이 하나둘 드러난다. 다이앤의 좌절은 베티의 희망과 쌍을 이룬다. 다이앤은 늘 주인공인 카밀라에 비해 비루한 현실과 그녀가 자신과 헤어지려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베티는 당당하게 오디션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리타와 사랑에 빠진다. 다이앤은 카밀라의 죽음을 사주하지만, 베티는 리타를 끝까지 보호하고 자신과 동화시킨다. 카밀라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게 되지만, 리타는 기억을 잃고도 제 발로 베티를 찾아온다.
영화 출연이 쉽지 않은 다이앤의 심정은 앞서 아담 케셔에게 가해지는 외압으로 발현되었다. 권력과 부를 쥔 수수께끼의 남성들이 영화의 제작 여부를 쥐고 흔들고 덩치 큰 남성들이 강압적으로 밀어붙인다. 그들이 소통하는 동안 느껴지는 기이한 압박감은 다이앤이 느끼는 무력감의 깊이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카밀라에 대한 다이앤의 죄의식은 윙키스 뒤편에서 겁에 질려 쓰러진 댄, 조의 부주의하고 어처구니없는 살인, 시체를 목격한 리타의 두려움으로 파편화되었다.
"가장 의미 있게 구조화하는 것은 그 정의상 가장 아름다운 것일 수밖에 없다."(『살아 있는 미로』) 데이빗 린치 감독이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정답은 없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퍼즐 맞추기를 계속 시도하게 된다. 이는 무작위해 보이는 현실들을 짜 맞추다 보면 정합성을 어렴풋하게 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혼돈에서 논리 정연한 질서와 구조를 발견하는 일은 곧 아름다움을 발굴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정합성은 미성숙한 자의식의 총체를 가리키고 있다. 베티는 '내가' 실력을 인정받고 '내가' 리타를 돕는다는 우월감에 취해 있다. 그녀의 자의식은 환한 빛이 비추는 현실에서 오디션 합격과 사랑을 얻는다. 하지만 밝은 빛 뒤에는 다이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감독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연인도 떠나가는 상황에서 성숙하지 못한 자의식은 파괴적인 열등감을 키운다. 어둠을 억압하는 빛과 빛의 존재를 잊은 어둠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카밀라의 죽음 이후 노부부의 환영에 쫓기는 다이앤은 공포에 질려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영화는 다이앤의 파멸에 다다른 직후 베티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보여 준다. 할리우드 야경 위로 베티와 금발 가발을 쓴 리타가 나란히 웃는 모습이 드리운다. 그리고 클럽 실렌시오에서 파란 머리 여자가 텅 빈 무대를 내려다보며 '실렌시오'라고 읊조린다. 양극단을 달리던 빛과 그림자가 통합된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모든 게 환상이라고 해서 관객이 경험한 147분의 영화가 없는 것이 되고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다. 그 말은 관객의 마음속에 맺힌 영화를 색다른 관점에서 곱씹어 보라는 초대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인 현실인지 분간하기를 포기하고 목격한 환상에 대해 침묵해 보자. 그러면 모르는 것에 대해 떠벌리는 우를 범하기 전에 자신이 목도한 바를 감각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한껏 몰입하여 의미를 직접 찾아내려고 애쓴 그 경험 자체가 이 영화를 잊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편 미성숙이 불완전을 뜻하지 않는다. 미성숙한 자의식에 대한 이 영화는 완전하다. 혼돈인 줄 알았던 곳에서 자의식의 빛과 그림자가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아름다운 완전성이 피어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빛과 어둠을 가로질러 성숙해지는 과정을 밟고 있는 모든 삶이 완전하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발굴한 그 눈으로 매 순간 당신 삶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포착해 내기를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