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어질 결심>
부산에서 형사로 근무하는 해준(박해일)이 느끼기에 살인 사건이 뜸하던 참이다. 3년 전 해결하지 못한 질곡동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한 PC방에 드나든다고 한다. 해준은 수완(고경표)에게 잠복을 맡기고 이포로 향한다. 부인 정안(이정현)은 주말 부부로 지내기 싫은 눈치지만 해준은 이포로 전근 올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들은 주말 부부 또는 섹스리스 부부는 이혼할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그래도 둘 중 하나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구태여 상기한다.
한편 해준의 관할에서 변사자가 발견된다. 높은 바위산에 오른 뒤 추락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말에 해준은 직접 등산용 밧줄을 매고 바위산을 오른다. 꼭대기에서 사망자의 소지품을 확인한 후, 그는 시신이 내려다 보이는 자리에 선다. 꼿꼿한 자세로 인공 눈물을 눈에 넣자 한결 또렷해진 시야로 바위산의 아찔한 높이가 감지된다. 죽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기도수(유승목)의 눈동자는 저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해준을 향하고 있다.
남편의 사망 소식에 젊고 예쁜 중국인 서래(탕웨이)가 경찰서에 찾아온다.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며 중국인이라 한국말이 부족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해준은 서래가 나타난 순간부터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서래는 남편이 언젠가 산에서 죽을 줄 알았다며 담담하고, 수완은 그런 서래가 의심스럽다. 어째서인지 해준은 서래 편을 들고, 수완에게 서래를 위해 쉬운 한국말을 쓰라고 당부한다.
이제부터 용의자 서래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그녀에게 질의하는 건 형사로서 해준이 할 일이다. 이포에 사는 정안에게는 젊은 중국인 아내가 죽고 늙은 남편이 남았다고 사실과 반대로 말한다. 해준은 서래가 몸에 남편의 이니셜을 새겼고 남편에게 구타당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간병인으로서 노인을 돌보는 서래를 망원경을 통해 몰래 지켜본다. 해준의 머릿속이 합법적으로 서래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정안은 알 수 없다.
해준은 시선의 우위를 점하는 인물이다. 바위산 꼭대기에서 죽은 기도수를 내려다볼 때 그리고 계단 위에서 수완을 내려다볼 때는 물리적으로 높은 위치에 서 있다. 자동차나 옥상에 숨어 아파트 안에 있는 서래를 지켜보는 해준의 시선 또한 일방적이다. 해준은 형사와 용의자라는 비대칭적인 관계라서 용인되는 시선을 누린다. 서래에 한껏 몰입한 그의 마음은 이미 망원경을 넘어서서 서래와 같은 공기를 들이쉬고 있다.
서래는 기꺼이 해준의 조사 대상이 된다. 그의 질문에 답하고 그가 대접하는 비싼 초밥을 먹고 그가 주는 치약과 방수 밴드를 기쁘게 받는다. 형사로서 해준은 서래가 남편을 죽였을 가능성을 재는 질문을 쏟아 낸다. 하지만 그의 눈빛과 행동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서래가 서툰 한국어에 민망하게 웃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화장실에 간 사이 뿌린 향수 냄새를 깊이 들이마신다. 서래는 형사와 용의자 놀이 이면의 진실을 직감하고 있다.
과거 화물선을 타고 한국에 불법 입국한 서래는 출입국 외국인청의 면접관인 기도수의 도움으로 추방을 면했다. 그녀의 외조부가 만주 조선 해방군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건국 훈장을 받도록 한 것이다. 서래는 한국 국적을 가진 기도수와 결혼해 한국 땅에서 계속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기도수는 죽었다. 이번에는 나이가 한참 많고 소유욕 강한 나르시시스트 기도수 대신 번듯한 형사 해준이 그녀 곁을 맴돈다.
서래는 해준이 몰래 지켜보는 시선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 역시 해준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PC방에 나타난 질곡동 사건의 용의자 이지구(이학주)를 뒤쫓아 힘으로 제압하는 해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서래가 사는 아파트에서 밤새 잠복하다가 곤히 잠든 해준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여유만만함을 보인다. 서래를 의심한다는 점만 빼면 해준은 서래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주는 든든한 경호인 같다.
수완은 해준에게 서래가 중국에서 엄마를 죽였다는 사실을 전한다. 이에 서래는 오랜 투병에 지친 엄마가 원하는 대로 고통에서 놓여나도록 도왔을 뿐이라 말한다. 그리고 기도수가 그동안 저지른 비리로 협박 받는 중 압박감에 자살했다는 증거들이 드러난다. 결정적으로 서래가 CCTV에 포착된 시간을 근거로 기도수가 사망한 시각에 간병 업무 중이었다고 보아 자살 사건으로 종결한다.
형사와 용의자라는 역할로부터 자유로워진 해준은 마음 놓고 서래와 시간을 보낸다. 그간 서래의 부실한 식사를 멀리서 지켜보았기에 자신의 거처에 불러 밥을 해준다. 함께 미결 사건에 대해 논의하고 서래 덕분에 질곡동 사건 진범 홍산오(박정민)의 행방을 알아내기도 한다. 사건이 종결되었어도 조사를 위해 찍은 서래의 사진을 없애고 싶지 않다. 해준은 이제 서래에게 예쁘다고 말할 수 있고 서래의 숨소리를 들으며 편히 잠들 수 있다.
서래는 해준이 품위 있어서 좋았고, 해준은 서래의 힘 들이지 않은 꼿꼿함이 좋았다. 해준은 서래 손에 박힌 굳은살을 보고 향 좋은 핸드크림을 발라 준다. 형사로서 그는 죽은 이를 똑바로 바라보는 자신의 눈에 직업적인 자부심을 갖고 있다. 바로 그 눈으로 서래를 마주 보는데 서래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피한다. 우산은 해준의 트렌치코트가 다 젖도록 서래에게 한없이 기울어 있다. 해준이 서래에게 빠져드는 동시에 그가 놓친 진실과도 가까워진다.
해준이 잠복하는 동안 거실 소파에 쭈그려 앉은 서래를 보고 말했다. "우는구나, 마침내." 아니, 서래는 웃고 있었다. 늘 진실을 포착한다고 자부하던 해준의 눈은 많은 걸 놓치고 있었다. 앞서 해준은 수완의 특기가 미행인데도 서래가 간병하는 할머니 집에 수완을 보냈다. 나중에야 서래를 돕겠다고 할머니 집에 방문한 해준은 할머니의 핸드폰에서 기도수가 사망한 날 138층을 오른 흔적을 발견한다. 직접 138층 높이의 바위산을 오르고 나서 해준은 서래가 범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품위를 지탱하던 자부심이 붕괴되어도 해준은 진실보다 서래를 지키기로 한다. 그는 서래에게 할머니의 핸드폰을 맡기고 이포로 전근 간다. 불면증이 더 심해졌고 살인 사건이 일어난 적 없는 이포에서는 운동화 대신 딱딱한 구두를 신는다. 정안은 드디어 함께 살 수 있어 좋지만 해준은 점점 시들어간다. 그 사이 서래는 투자 전문가 행세를 하는 임호신(박용우)과 결혼했고 빚쟁이들에게 쫓겨 이포로 이사 온다. 이포 수산물 시장에서 해준 부부와 서래 부부가 조우한다.
정안은 젊은 중국인 부인이 죽은 사건을 들은 적 있다. 서래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해준을 그녀가 모를 리 없다. 집에 돌아와 넌지시 사실 관계를 묻지만 해준은 얼버무린다. 공교롭게도 호신이 죽은 채 발견되고 해준은 이포 최초의 살인 사건을 맡는다. 해준의 이성과 직감 모두 자신의 관할에서 두 번이나 남편이 사망한 서래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그런데 서래에게 다른 무엇보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는 질문이 가장 앞선다.
서래는 내가 그렇게 나쁘냐고 되묻는다. 그동안 그녀는 살아남는 일이 너무 중요했다. 한여름에 땀과 오물을 뒤집어쓴 채 한국에 밀입국했고 그녀를 소유물 취급하는 남편 기도수에게 죽도록 구타당했다. 자기 힘으로는 고달픈 삶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체념이 서래를 지배하는 듯하다. 그녀가 턱 끝까지 차오른 죽음을 피해 온 방법은 두 가지다. 권한을 가진 남자가 나타나 서래를 구해주거나 한계에 다다른 서래가 상대를 죽임으로써 상황을 일단락하거나.
서래가 보던 드라마에는 매번 죽어가는 여자와 애달파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서래는 거기에 자신과 해준의 관계를 대입하고 싶다. 해준이 완전한 붕괴를 고백하는 음성 파일을 닳도록 들으며 고통 속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런데 호신이 그 음성 파일을 빌미로 서래를 협박하고 정안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위기에 처한 서래는 익숙한 방법으로 상황을 모면한다. 또 다른 살인으로 호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사철성(서현우)이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해준은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활기를 얻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개입함으로써 은연중 자신은 안전함을 확인하고 살아있음을 만끽하는 듯하다. 반면 서래는 죽음 말고 사람과 헤어지는 법을 모른다. 사랑하는 엄마의 죽음을 도왔고, 고소공포를 견디며 높디높은 바위산에서 기도수를 죽였다. 서래에게 죽음은 곧 헤어짐이자 효과적인 생존 수단이기도 하다.
자부심이 무너져 내린 곳이 바닥인 줄 아는 해준은 서래의 심연을 모른다. 내가 만만하냐는 질문은 서래가 범죄를 덮는 데에 자신을 또 이용하려고 이포에 왔을 거라는 그만의 의심을 품고 있다. 해준이 서래를 이해하려면 한참 더 무너지고 깨져야 한다. 그는 눈 내린 호미산에서 서래에게 등을 보일 때 경찰이 아닌 인간으로서 죽음의 공포를 몸소 느낀다. 서래와 입 맞추고 전율한 직후 당연하게 누려온 결혼 생활이 무너져 내린다.
마침내 해준도 음성 파일의 존재를 알게 된다. 철성의 어머니와 호신 모두 해준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까지도. 그러나 서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다는 해준의 말에 서래는 절박하게 붙들었던 유일한 희망이 환상에 불과했음을 깨우친다. 이제 그녀는 해준으로부터 사라짐으로써 그의 영원한 미결 사건이 되려 한다. 벽에 붙인 사진을 뚫어져라 보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서래를 생각하게 만드는 게 해준의 사랑을 얻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서래는 해준을 죽음 위에 꼿꼿이 서서 누리는 삶에서 끌어내리고 딱딱한 구둣발 대신 말캉한 운동화로 땅을 딛게 한다. 더 깊은 바닥으로 붕괴하고 나서야 해준은 그보다 한참 더 깊은 서래의 심연을 짐작한다. 그러나 바닷물이 밀려드는 가장 낮은 땅을 아무리 뒤져도 그보다 아래에 묻힌 서래를 찾을 수 없다. 그의 성긴 말들에서 사랑을 기어코 발라낸 서래의 절박하고 처연한 사랑을 뒤늦게 이해한다. 깊은 회한에서 차오른 눈물이 해준의 눈을 적신다.
해준은 끝끝내 미결로 남은 생존(生存)과 자존(自尊) 사이 간극을 홀로 헤맨다. 살인 사건을 여럿 해결했지만 한 목숨이 끊어지고 누군가가 더 이상 살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어떤 건지 잘 몰랐을 것이다. 서래의 죽음으로부터는 조금도 활기를 얻을 수 없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