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팬텀 스레드>
연약한 존재를 돌보는 기쁨을 아는가. 어느 날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던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은 자신을 돌보는 아내의 다정한 눈빛을 목격했다. 아내에게서 그런 눈빛을 정말 오랜만에 본 감독은 다음 날 좋은 아이디어가 생겼다고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연락했다. 그러니까 <팬텀 스레드>는 돌보는 사람이 느끼는 깊은 만족감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알마(빅키 크리엡스)는 레이놀즈와 그녀가 서로 이상적인 것을 주고받는 사이임을 말한다. 그런데 하디 박사(브라이언 글리슨)는 레이놀즈가 까다로운 사람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유별난 성미가 관계 유지에 걸림돌이 될 거라는 지레짐작이 묻어 있다. 알마도 레이놀즈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사람임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알마는 레이놀즈와 함께하는 삶에 깊이 만족하는 듯하다.
레이놀즈 우드콕(다니엘 데이 루이스)은 상류층 여성을 위한 런던 의상실 '우드콕 하우스'의 다자이너다. 좁고 높은 우드콕 하우스 건물 안에서 그는 일과를 완벽하게 통제한다. 아침이면 말끔히 단장하고 식사 자리에 앉아 조용히 드레스 스케치를 그린다. 누나 시릴(레슬리 맨빌)이 그의 수호자로서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한다. 레이놀즈는 아름다운 의상을 만드는 일에는 능숙한 반면 성가신 여자를 내보내는 일은 시릴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헨리에타 백작 부인(지나 맥키)의 드레스를 마무리하고 레이놀즈는 유달리 어머니가 생각나서 마음이 어지럽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 보랏빛 드레스를 보셨더라면 어땠을까. 시릴이 환기를 위해 시골집에 가자고 제안하고, 레이놀즈의 자동차는 새벽빛이 밝아오는 도로를 거칠게 달린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하러 들린 식당에서 서툰 일솜씨를 멋쩍은 웃음으로 무마하는 알마를 만난다. 알마의 반짝이는 생기를 알아본 레이놀즈는 그녀가 메뉴를 받아 적은 종이를 챙기고 저녁 식사를 제안한다.
식당 일을 마친 알마는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나타난다. 그러나 레이놀즈는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며 립스틱을 지운다. 알마보다 한참 나이 많고 자연스럽게 알마를 통제하려 드는 레이놀즈는 사실 어머니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옷에 어머니의 흔적을 바느질해 다니고 어머니의 웨딩드레스를 직접 만들어서 결혼하지 못한다는 저주를 의식한다. 독신으로 살 운명이라고 단정하는 레이놀즈에게서 알마는 강한 척하는 어린아이를 본 듯하다.
그리고 레이놀즈는 알마에게서 완벽함을 본다. 그는 드레스 디자인을 알마의 체형에 맞게 변형하고 알마의 얼굴을 밝혀줄 원단을 신중히 고른다. 알마는 자신의 몸매를 좋아한 적 없다. 알마는 치수를 재는 레이놀즈에게 가슴이 없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레이놀즈는 알마의 몸이 완벽하다고 답한다. 게다가 가슴이야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 뒤따라 시골집에 도착한 시릴도 알마의 치수를 받아 적고는 레이놀즈가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체형이라고 덧붙인다.
레이놀즈는 알마를 발견해 기쁘다. 알마는 레이놀즈에게 무엇을 하든 조심스럽게 대해주기를 당부한다. 서툰 식당 종업원이었던 알마는 레이놀즈가 입혀준 완벽함을 뽐내며 그의 단골 식당에 들어선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알마를 보며 레이놀즈는 끊임없이 영감을 받는다. 그는 알마를 우드콕 하우스로 초대해 자신의 옆방을 내어주고 새벽부터 그녀를 깨워 작업을 시작한다.
알마는 우드콕 하우스의 정체된 공기를 휘젓는다. 앞서 레이놀즈를 거쳐간 여자들과 달리 알마는 조용히 마네킹 역할만 하며 그의 사랑을 기다리지 않는다. 알마의 취향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레이놀즈에게 지지 않고 대꾸하며, 레이놀즈를 자극해 저돌적으로 차를 몰아 그의 방으로 초대하게 만든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는 빵의 단단한 표면을 긁는 마찰음으로 레이놀즈의 신경을 거스른다. 게다가 레이놀즈의 예민한 성정에 자유롭게 의문을 품는다.
그래도 알마 덕분에 레이놀즈는 끊임없이 새로운 드레스를 만든다. 드레스를 입은 알마는 카메라 앞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인다. 우드콕 하우스의 패션쇼에서 레이놀즈는 문에 달린 외시경을 통해 알마를 뚫어지게 본다. 그의 드레스가 북돋워주는 아름다움을 당당히 표현할 줄 아는 알마를 보면, 일상에서 달갑지 않았던 순간들을 모두 잊게 된다.
패션쇼가 끝나면 알마의 완벽함을 끌어내는 창조주는 부드럽고 연약한 아이가 된다. 모든 걸 쏟아붓고 녹초가 된 레이놀즈는 침대 위에 웅크린 채 애타게 알마를 찾는다. 알마는 레이놀즈를 마음껏 돌보고 사랑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물론 기력을 회복한 레이놀즈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예민한 통제광으로 돌아오지만 말이다.
한편 우드콕 하우스 건물을 지원하는 바바라 로즈(해리엇 샌섬 해리스)의 재혼 소식이 전해진다. 바바라 로즈는 넘치는 물질에 파묻혀 살지만 스스로의 귀함을 조금도 체화하지 못한 인물이다. 레이놀즈는 그녀를 위해 짙은 녹빛의 드레스를 만들고 결혼식에 참석한다. 그러나 레이놀즈의 작품을 입고도 자기 삶의 비참함을 감추지 못하는 바바라 로즈에게 알마는 진심으로 분개한다. 사람들에게 맞서기를 피해왔던 레이놀즈도 용기를 얻어 드레스를 돌려받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드레스를 되찾고 짜릿한 승리감을 맛본 레이놀즈는 고마움을 느끼며 알마에게 깊이 키스한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알마의 뒤이은 고백에 레이놀즈는 멈칫한다. 이후 웨딩드레스를 맞추러 우드콕 하우스에 방문한 프랑스 왕실의 공주에게 알마는 자신이 우드콕 하우스에 살고 있음을 직접 알린다. 레이놀즈의 불확실한 마음과 우드콕 하우스에서의 어정쩡한 지위로 인해 알마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인다.
이에 알마는 레이놀즈가 혐오할 게 뻔한 깜짝 파티를 열어 오일 대신 버터에 졸인 아스파라거스를 내놓는다. 그러나 레이놀즈는 겉보기에 유지되던 평화의 이면을 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작업을 앞두고 늘 보호받던 일상이 흐트러지는 낯선 상황은 레이놀즈의 방어 기제를 자극할 뿐이다. 서로에게 날 선 말들을 쏟아내고 만 두 사람은 우드콕 하우스에 더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온다.
갈등을 마주하기는커녕 알마를 그저 외면하는 레이놀즈와 달리 알마는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벽을 적극적으로 허문다. 알마는 곱게 간 독버섯 소량을 레이놀즈의 찻주전자에 넣고, 차를 마신 레이놀즈는 완성된 웨딩드레스 위로 쓰러진다. 꼿꼿하게 서서 강함을 연기하던 레이놀즈는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알마의 손길만 받아들이는 어린아이가 된다.
열에 달뜬 레이놀즈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어머니의 환영을 본다. 그리고 어머니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던 소년에게 때마침 알마가 나타나고 어머니는 사라진다. 밤사이 레이놀즈 대신 우드콕 하우스의 직원들과 알마가 드레스를 완성한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개운한 아침을 맞이한 레이놀즈는 어머니를 찾기보다 지금 곁에 있는 알마의 손을 맞잡는다. 그리고 알마 없이 남은 생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확신을 느끼며 알마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부부가 된다고 해서 알마를 단숨에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드콕 하우스를 벗어난 알마는 여전히 버터나이프로 빵을 벅벅 긁는 사람이다. 발티모어 부인(줄리아 데이비스)은 철부지와 결혼했다며 레이놀즈를 딱하게 여긴다. 새해 전야에 난데없이 춤추러 가고 싶다는 알마 때문에 레이놀즈는 평생 발을 들인 적 없었을 파티장까지 간다. 알마의 모든 게 거슬리는 레이놀즈는 이 결혼을 미치도록 후회한다.
알마는 다시 한 번 대범하게 레이놀즈의 심기를 거스른다. 코를 찌르는 버터 냄새, 계란물이 팬에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 높은 곳에서 물을 따르는 아슬아슬함. 알마의 행동 하나하나가 레이놀즈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레이놀즈는 조금도 기껍지 않은 태도로 그녀가 만든 독버섯 오믈렛을 한입 넣는다. 알마는 레이놀즈가 오직 그녀의 손길만 기다리는 연약한 아이가 되어 쉬기 바란다고 고백한다. 오믈렛의 정체를 직감하고 꿀꺽 삼킨 레이놀즈는 알마에게 키스를 청한다.
알마의 독버섯이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던 레이놀즈를 무너뜨린다. 레이놀즈가 연약함을 내보이며 알마의 돌봄을 받아들이는 며칠 동안 알마가 전능한 보호자가 된다. 레이놀즈는 절대자의 자리를 내주어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알마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알마에 의한 관계의 전복은 경직된 상하 위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알마와 레이놀즈는 오직 두 사람만이 감각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간다.
알마를 통해 이 이야기를 전해 듣는 하디 박사는 그들의 결속에 다른 사람의 잣대는 무의미함을 알았을 것이다. 둘만의 질서를 세우고 무너뜨리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기로 승낙한 관계는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듯하다. 레이놀즈는 무사히 회복하고 다시 창조주 자리에 선다. 다만 언제든 알마에게 항복할 준비가 된 채로 말이다. 이제 레이놀즈는 독버섯 없이도 알마의 무릎 위에 자신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어머니를 그리는 그처럼 훗날 레이놀즈를 그리워할 알마에게 현재를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