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독일살이를 할 때였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두 번째 방문했던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 스타벅스에서 지하철 시간을 기다리며 되뇌었다.
나의 첫 번째 독일살이는 튀링엔 주에 있는 예나(Jena)라는 소도시에서 대략 반 년간의 생활이었다. 예나에서 만난 친구들과 농담 삼아 말하는 용서할 수 없는(?) 독일만의 특징들 (가령, 택배를 자주 잃어버릴 수 있고, 서류 등의 행정처리가 우리나라에 비해 심하게 늦고, 아직도 열쇠를 사용하며 그를 잃어버릴 시에는 빈 집에 들어갈 수 없고, 모든 것이 테어민으로부터 시작하는 등을 총합해 나라가 아날로그스럽다)을 제외하고는 인생에서 손꼽는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 돌아온 후 약 1년간의 한국생활을 하면서는 독일에서 겪은 불편함들이 이미 전부 미화된 상태였다.
예나와 작별을 할 때의 내 나이는 대략 이십 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고 대학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다시 독일에 돌아올 때는 아마 30대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입국한 지 거의 1년 만에 독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한국 기준으로 한 학기를 종료하고 두 번째 학기의 종료 직전 시점에 있을 때였고, 그와 별개로 독일이 그리웠다. 그곳의 여유와 검소함, 친구들에게 받은 사랑, 그로 인해 온갖 자극에도 예민해지지 않고 무한히 긍정적일 수 있었던 내 모습도 그리웠다. 한국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문득문득 올라오는 사무침은 어쩔 수 없었다.
학교 차원에서 독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생길 때마다 지원했고 다른 장학금은 이미 한번 불합격한 상태였다. 졸업예정 및 취업 준비를 준비하는 대학생의 입장에서 꽤 많은 불합격의 고배를 마신 상태였기에 그냥 당분간은 한국에 있으라는 얘기인 건가 하고 낙담할 때 즈음 학과에서 생명의 동아줄 같은 공지가 올라왔다.
이거다 싶었다. 기말고사 기간에 심지어 급하게 모집해서 지원서를 쓸 시간도 넉넉지 않은 프로그램이었지만 나한텐 기말고사보다 이게 훨씬 중요했다. 지원서를 쓰면서부터 머릿속은 이미 독일에 가 있었다. 합격하면 독일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이 소식을 전할까, 내가 있던 예나 기숙사의 룸메들은 그대로 있을까? 같이 수업 듣는 친구는 나보고 "이미 독일 가서 소시지에 맥주 한잔 했죠?"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프로그램에 합격했다.
14시간이나 되는 장거리비행이 걱정되지 않고 설레기만 했다. <엘리멘탈>, <노트북>,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헤어질 결심> 네 편의 영화를 보고도 한참 남은 비행시간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독일에 도착할 즈음 괜히 지도를 확대해 내가 있던 예나를 확인하며 독일 땅에 왔음을 실감했다.
혼자였지만이미 한 번 와 봤던 나라였기에 첫 번째 독일살이 전 느꼈던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었다.
역 입구 전체가 통유리인 걸로 유명한 베를린 중앙역
그렇게 나는 베를린에서 대략 3주간의 두 번째 독일살이를 설레기만 한 마음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르고 그저 신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