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경 Jan 11. 2024

구멍 메우기

Track no.2 <심해> by 신지훈

깜빡깜빡


W.G.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라는 작품에 "나는 이런 고도에서 우리 자신을 내려다보면 우리가 우리의 목적과 결말에 대해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가 끔찍하리만큼 분명해진다는 생각을 했다"라는 구절이 나와. 점멸하는 비행기 날개의 등을 보며 기분이 묘했어. 무조건 돌아오겠다고 다짐한지 1년 만에 다시 돌아오다니 역시 알 수 없는 인생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수많은 비행기가 지나다닌 이 항로에 내가 타고 있는 비행기가 깜빡거리며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거든. 이 비행기에 몸을 실은 승객들 인생의 목적과 결말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나 여기 있었다! 는 흔적정도는 남길 수 있으니까


구멍 1. 데이터

도착할 무렵부터 슬슬 걱정이 되긴 했어. 지난번에 쓰던 독일 유심이 있어서 로밍을 안하고 왔는데 계정 비밀번호를 잊어버려서 유심에 데이터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길이 없었거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데이터 잔량부터 확인했어.

^__^

이 시점부터 데이터 거지(?) 의 험난한 여정이 시작됐지. 대한항공 항공기는 프랑크푸르트 공항 2터미널에 내려. 지난번엔 루프트한자를 이용했기 때문에 1터미널에 내려서 바로 중앙역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었는데, 2터미널은 기차역과 연결되어있지 않아서 1터미널로 먼저 넘어가야해. 이 사실을 몰랐던 나는 공항에서 한참을 헤맸어. 다행히 무료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었지만 인포데스크에 물어도 공항 내에서 알디톡 굿하벤을 살 수 있는 곳은 없었어.

프랑크푸르트 공항이나 중앙역에서는 짐을 조심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헤매는 와중에 어떤 남자분이 내가 길을 헤매는 걸 확인했는지 내 캐리어를 쳐다보다 먼 발치에서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어. 진짜 무서워서 20kg짜리 캐리어 하나, 8kg짜리 캐리어 하나, 백팩을 질질질 끌고 바로 화장실로 숨어(?)들어갔어.

우여곡절 끝에 중앙역으로 가려면 1터미널로 가야한다는 표지판을 보고 버스를 타고 1터미널로 넘어갔어. 하지만 1터미널에서도, 중앙역 근처에서도 데이터를 충전할 수 있는 곳은 없었어...

(물심양면 도와준 독일에 있는 친구들아 진짜 고마워)

그나마 도착한 날은 중앙역 근처 숙소에서 하루 묵을 계획이었고 다행히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까지 가는 ICE에서는 와이파이를 쓸 수 있어서 괜찮았어.

다음 날 베를린 중앙역에 내려서가 문제였지. 역 밖으로 나오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이기 때문에 역 안에서 알디가 있는 곳을 지도로 보고 길을 외워서 찾아가야 했었어.

첫 번째 시도, 대실패!
중앙역은 출구가 많아서 출구를 잘 보고 나와야 하는데 이상한 곳으로 나와서 걷다가 뭔가 잘못됐음을 감지했어. 다시 역으로 돌아가서 출구를 확인한 후

드디어 데이터를 충전했어!

마침 우리학교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있는, 내가 예나에서 살 때 같은 학교를 다닌, 본가가 베를린인,  현재 잠깐 한국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온 친구가 많이 도와줬고 묵을 곳도 제공해줬어.


안톤, 못 읽겠지만 고마워 진짜 정말이야.

짐을 놓고 안톤과 안톤네 친구 오스카와 함께 베를린 시내도 구경하고 밥도 먹었어.

순서대로
베를린에서 본 학원(nachhilfe 라고 적혀있는데 여기가 학원이래! 공부방 같은 형태), 안톤이 굉장히 관심 있어 한 한식당, 그리고 베를린에서 제일 유명한 커리부어스트가게, 케밥 가게.
저 두 곳은 매일 저렇게 줄을 선다고 해. 이 날은 줄이 짧은 편이었다고.

그리고 베를린은 중고 옷 가게(빈티지 샵)가 유명하대. sehr Berlin style 이라면서 나보고 가죽재킷을 하나 골라보라고 했는데 솔직히 걸려있는 것들이 진짜 이상했는데다가 (해리포터에 나오는 필치 씨가 입을 것 같이 생긴^_^) 너무 비싸서 괜찮다고 했어. 사진을 못 남겨 아쉽다. 너희 진짜 이런 거 입냐고 물어봤는데 상태가 괜찮은 것들은 정말 사서 입는다고 했거든.

그렇게 시내를 구경하다가 내가 묵을 오스카네 집으로 돌아왔어. 잠시 찾아온 평화였지만 메울 구멍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지.


구멍 2. 교통권

더 큰 문제는 교통권이었어. 49유로 티켓이 끝난 줄 알고 베를린교통(BVG)에서 월권(Monat Ticket)을 산 게 잘못이었어. 비용 아끼겠다고 나름 알아보고 10-Uhr-ticket(오전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사용할 수 있는 한 달짜리 티켓)을 71유로나 주고 샀거든. 그런데 49유로 티켓을 아직 살 수 있었고 월권을 환불하려고 했지. 자그마치 20유로 정도 더 주 고 산 거니까!
수소문해보니 중앙역이나 큰 역 고객센터에 가면 티켓을 교환해 준대. 그래서 중앙역 고객센터로 갔어. 갔더니 여기는 DB(독일 철도청)이고 나는 BVG(베를린 교통)에서 표를 산 거라 그 쪽 고객센터로 가야 한대. 거기 가면 49유로 티켓으로 교환을 해 준다고 말하더라고. 그래서 다음 날 수업을 마치고 BVG고객센터로 찾아갔어.

위치가 바뀌었는지 구글맵이 잘못 알려준건지 지도에 표시된 곳에 고객센터가 없어서 길을 조금 해메다가 옷가게 직원분께 길을 물어서 겨우 찾아갔어. 가서 상황을 설명했지.


: 월권을 샀는데 49유로 티켓으로 바꾸고 싶어.

직원: 온라인에서 샀어?

: 응

직원: 온라인에서 샀는데 왜 여기서 환불하려고 해, 온라인으로 환불 해


이때부터 뭔가 이상했지만 온 김에 해결하고 가고 싶어서 그냥 여기서 해결하고 싶다고 같이 해줄 수 있냐고 했어. 그때부터 직원이 한숨을 쉬기 시작했지. 앱을 켜서 뭘 막 누르더니 49유로 티켓을 결제하더니 2월 1일부터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어.


: 그거 아니야. 나 1월 말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 내말은 월권을 환불하고 1월에 사용할 수 있는 49유로 티켓을 사고 싶다는 뜻이었어.

직원: 그럼 그렇게 말했어야지! (한숨 푹푹) 이거 다시 취소해야 하잖아! (화내면서 빨리 말하기 시작)

: 미안해 내가 독일어를 그렇게 잘하지 못해. 영어로 말해줄 수 있을까?

직원: 나 영어 못해.

: 그러면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천천히 말해줘.

직원: (다른 직원들을 쳐다보며) 여기 영어할 줄 아는 사람 있어?


이미 직원은 내 답답한 독일어에 화가 난 상태였고 영어 할 줄 아는 다른 직원을 찾더라고. 나는 오히려 잘 됐다 싶어서 그 사람을 기다렸어. 그 분이 일을 보고 있어서 기다렸는데, 나를 상대하던 직원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어.


직원: (취소된 바우처를 가리키며) 너 1월 말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지? 이거 2월부터 쓸 수 있는 티켓이야.

: 취소된 거야?

직원: 그래!

: 그럼 내가 원래 샀던 월권을 환불하고 1월에 쓸 수 있는 49유로 티켓을 살 수 있을까?

직원: 환불은 온라인으로 해! 실물 티켓이 아니잖아!


이러고 있는데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직원이 왔어. 내가 상황을 설명하니까 또 똑같은 말을 하더라고 온라인으로 샀으면 온라인으로 환불하라고. 여기서 해결하기를 포기하고 온라인으로 어떻게 환불하냐고 물어봤어. 앱으로 들어가서 하라는거야. 어플에는 환불을 선택하는 배너가 없었거든. 그러더니 앱을 켜서 챗봇에 들어가더니 여기다가 물어보래. 그리고 마지막에 한 말이 가관이야. "이봐 고객, 뭘 모르면 사지를 마!"


일단 그 직원이 잘못 결제 한 2월 49유로 티켓이 취소된 건지만 재차 확인을 하고 거기서 그들이 화내는 걸 계속 듣고 있으면 정말로 눈믈이 날 것 같아서 그냥 고맙다고 하고 나왔어. 글에서는 잘 못 느끼겠지만 그 직원 둘이서 나한테 엄청 화를 냈거든 얼굴 빨개지면서까지. 그리고 영어 좀 한다는 직원도 영어를 잘 못하더라고. 말이 안통하니까 화가 났겠지.


어쨌든 내가 해결하려던 일은 하나도 해결 못 하고, 겨울이라 해도 일찍 져서 나오니까 깜깜하고, 그들이 내는 엄청난 화에 짧은 독일어로 계속 되묻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어서 고객센터를 나오니까 한바탕 전쟁을 치른 느낌이었어. 혼이 그냥 쏙 빠졌어. 너무 벙쪄서 잠깐 서 있다가 일단 집에 가서 고객센터에 메일을 넣어 보자고 생각하고 집으로 왔어. 집에 오는 길에도 멍 해서 원래 내려야 하는 정류장보다 다섯 정류장이나 더 갔더라고. 정말로 울고 싶었는데 그리고 울 뻔 했는데, 생각을 정리해보니 지금 당장 울어서 해결될 일이 하나도 없어서 울지도 못했어. 결국 집에 와서 챗봇에다 채팅을 썼더니 자동응답으로 메일이 오더라고. 그 메일에 고객센터 메일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어서 고객 센터로 메일을 넣고, 답변을 기다리면서 잤어.

정리하자면 월권은 이미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환불할 수가 없대. 그리고 어차피 49유로 티켓을 사도 고속열차 (IC, ICE)는 포함이 안돼서 그냥 49유로 티켓을 사지 않기로 했어. 독일에 오면 교환학생이나 유학생을 제외하고는 교통권을 도시별로 따로 구입해야 해.  이것도 주마다 정책이 다르니 꼭 잘 알아보고 와. 나는 49유로티켓이라는 특수한 선택권이 있어서 이렇게 문제가 생겼는데, 일반 여행객들은 보통 도시별로 교통권을 따로 사거나 DB어플로 시티티켓이 포함된 표를 사야 검표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

이렇게 내 큰 구멍 2개를 다 메웠어. 그리고 한국에서 도움을 청하는 외국인을 만난다면 정말 친절하게 응해줄거라고 다짐했어. 액땜을 세게 했으니 이제 앞으로 문제는 없겠지?! 제발!!

작가의 이전글 [나의 두 번째 독일일기]1년 만에 돌아와 버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