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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Jan 14. 2024

일종의 환상 깨기랄까

Track no.3 <에피소드> by 이무진

독일이 왜 그렇게 좋았을까

베를린에서 산 지 7일째 되는 날이야. 아직까지도 독일이 왜 그렇게 좋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뾰족한 이유를 찾지 못하겠어. 이게 사랑인 걸까..? 여기서 살다 보니 독일을 좋아했다기보다 예나와 잘 맞았다고 생각해. 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에 가까운 삶을 예나에서 누릴 수 있었거든. 검소함, 여유로움 등등.

아쉽지만 베를린은 검소함이나 여유로움과는 거리가 먼 도시인 것 같아. 아무래도 수도고, 대도시다 보니 상대적으로 유행에도 민감하고 (한국과 속도를 비교하자면 많이 느리지만 숏패딩에 카고바지, 어그부츠가 여기서도 보여서 신기했어. 인터넷 inter-net 의 힘을 실감한 순간이야) 여유도 많이 없어 보여. 고객센터에서 직원이 한숨 푹푹 쉬고 짜증을 내기도 하고, 자전거 도로에 보행자가 침범하면 엄청 뭐 라그래. (실제로 베를린 자전거도로에서는 자전거 탄 사람들이 왕이래."Die Radfahrer sind König auf dem Radweg") 그리고 독일에 오면 사람들이 무단횡단 하는 모습을 꽤 자주 볼 수 있는데, 베를린에서는 제대로 안 보고 무단횡단 했다가 운전자한테 무한 경적세례를 받을 수도 있어.

어쨌든 대도시에서의 삶이 퍽퍽한 건 여기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가 봐. 만약 독일살이를 베를린에서 시작했다면 독일이 그만큼 좋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면서 지내고 있어. 아, 날씨가 안 좋아서 더 그럴 수도 있겠다. 7일 동안 해를 한 번밖에 못 봤으니 말이야.

그래도 좋아. 행복해. 어떨 때 가장 행복하냐면 혼자서 음악 들으면서 길 걸을 때. 아무리 베를린에 사람이 많다고 해도 서울만큼 많지 않아서 사람 없는 길을 혼자 걸어가면 너무너무 좋더라고.

길 걸으면서 이 세 곡을 가장 많이 들었어. 특히 <심해>는 동트기 전 아침 트램 타러 갈 때의 분위기와 정말 잘 어울려. <심해>나 <에피소드>가 조금 처진다 싶으면 아이유의 <하루 끝>을 들어.
음악은 향기와도 같아서 어떤 노래를 들으면 그때의 상황이나 사람이 떠올라. 지난 독일살이 때 르세라핌의 <antifragile>을 많이 들어서 그 노래를 들으면 여전히 예나가 떠오르는 것처럼.

독일 오면 꼭 하는 루틴은 아침에 향초 켜기야. 오후에 듣던 수업을 오전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아침 시간이 여유로웠는데 오전반으로 수업을 옮기는 바람에 아침에 향초는 켜지 못하지만 뭐, 집에 와서 켜면 되니까.

드럭스토어 DM이나 로스만에 가면 향초 종류도 다양하고 무엇보다 저렴해. 식물성 재료로만 만든 향초를 고를 수도 있어서 늘 그 코너에서 사는 편이야.

서울보다 춥다고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베를린 한국만큼 추운 것 같아. 홈스테이 중이라 냉장고에 내 공간이 있긴 한데 작기도 하고 괜히 부엌으로 갔다가 주인 분들이랑 자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물을 내 방 베란다에 내놨어. 근데 이렇게 얼었지 뭐야? 그만큼 날이 추워. 나같이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에게 겨울 독일은 롱패딩 필수야.

마트에 가면 잎채소를 1유로도 안 되는 가격에 살 수 있어. 독일에서 야채를 잘 못먹는 게 꽤나 고통스러운데 잎채소를 사서 이삭토스트처럼 계란물이랑 섞고 소시지와 치즈를 넣어서 만든 토스트. 지난번 독일살이 때도 많이 해 먹었던 만만한 메뉴야. 거기에 과일을 가끔 곁들이고 컵커피는 필수! 한국에서는 지난번에 사려다가 비싸서 못 먹었는데 마트에 레드키위를 팔길래 사 봤어.

베를린의 상징 텔레비전 타워. 남산타워같이 생겼지? 독일 땅덩어리가 큰 만큼 텔레비전 타워도 가까이서 보면 정말 압도당할 정도로 엄청 커. 이 날은 오후반 수업 마지막 날이었어. 독일은 겨울에 4시 30분 전에 해가 지는데 가게들도 대부분 7시쯤에 닫아. 수업이 6시에 마쳐서 끝나고 나면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거든 그래서 오전반으로 수업을 옮겼어.
오후 반을 이틀 들었는데 그 사이에 사람들이랑 내적 친밀감도 생기고 무엇보다 선생님이 너무 좋았어서 조금 아쉬웠지만, 금 같은 오후 시간을 수업으로만 날릴 수 없어서 내린 결정이야. 정말 많이 고민했는데 잘 한 결정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지금은 완전 만족해!


첫 번째 독일살이를 끝내고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독일이 정말 그리웠어. 그곳에서 잘 챙겨 온 마음가짐 덕분인지 친구들에게 받은 사랑 덕분인지 다행히도 한국생활이 완전히 지옥 같지 않았거든. 그러면서도 계속 독일로 다시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늘 했었어. 아직도 지금 내가 1년 만에 여기 다시 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는 않아. 내 생각에 베를린 생활이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인 것 같아.

철도청 파업의 영향인지 아침에 트램을 타면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당연히 소도시인 예나보다 사람도 많아. 수업을 듣는 곳이 베를린의 중심부 쪽이라 수업 끝나고 길을 나서면 온갖 가게에 붙은 SALE이라는 표시가 수도 없이 나를 유혹해. 독일 사람들은 꾸밀 줄 모르고 검소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베를린 사람들은 유행에도 민감하고 꾸미는 것도 좋아하더라고. 물론 한국보다는 훨씬 훨씬 덜하지만. 그리고 내 기준 독일 시내에서 탈 수 있는 대중교통수단 중에서 고속 열차를 제외하고 청결도로 순위를 매긴다면 버스> 트램> U Bahn(지하철)인데, 솔직히 한국 지하철이 훨씬 깨끗해. 예나에는 지하철이 없어서^^ 대중교통 탈 때 스트레스를 안 받았나 봐.

베를린이라는 대도시에 살면서 내가 품었던 독일에 대한 막연한 환상들이 하나씩 깨져가고 있는 중이야. 예나는 그 환경 자체가 나한테 행복을 가져다주었다면 이곳에서는 행복을 느끼려면 불필요한 것들을 차단하려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해. 아무래도 예나보다 사람이 많으니 위험한 사람들도 많고 정책이나 여러 가지 사회적인 약속들로 자유로운 서양 사람들의 영혼을 완벽하게 통제하기란 쉽지 않겠지.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별이 잘 안 보여!! 그렇다고 한국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거나 이 나라가 싫다는 말이 아니야. 환상 속 유토피아 같은 곳에서 점점 사람 사는 곳이라는 인식으로 바뀌고 있달까. 그냥 다른 나라에 있는 또 다른 고향 같은 느낌이야.

독일의 유명한 음유시인인 볼프 비어만이라는 사람이 있어. 우리 학과 교수님의 논문에 그의 인생이 시시포스 같다고 표현한 부분이 있는데 내 인생, 우리의 인생과도 닮아 있어서 재미있었어. 논문 초록 중 일부 내용이야.

한국과 독일 그 어느 곳에도 유토피아는 없었어. 베를린 생활을 하면서 뿐만이 아니라 첫 번째 독일살이 때 행복감을 느끼면서도 이 나라에서 평생을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은 분명히 있었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인 삶, 내가 바라는 삶에 대한 꿈은 여전히 갖고 있어.

어떠한 장소로 도망간다고 해서 유토피아가 실현되는 게 아니라는 말처럼, 행복한 사람은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처음부터 절망했었지만 언제나 새로운 희망을 품으며 살아가는" 비어만처럼.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앞으로 베를린 생활도 기대가 돼. 별 이슈가 없으면 이틀에서 삼일에 한 번 연재하기로 나와 약속했는데 짧은 시간 안에 하고 싶은 게 많다 보니 집에 돌아오면 피곤해서 쉽지는 않네. 그래도 노력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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