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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심소현 Oct 06. 2021

내 가치관을 바꿔버린 육아 고전들

나만의 육아 철학을 만들어 가다.

도서관에서, 서점에서 육아서, 교육서를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이 책들은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약 250여 년 전 유아 교육에 대한 철학을 설파했던 장 자크 루소, 마리아 몬테소리, 페스탈로치의 책들을 보며 ‘내가 얼마나 아이라는 존재에 대해 무지했었나’를 깨달았고, 영재 교육의 시초라 불리는 칼 비테의 책을 보며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육아에 대한 고정관념이 완전히 무너지기도 했다. 누구나 다 키우는 대로, 부모님이 우리를 양육한 대로, 그렇게 평범하게, 아니 어쩌면 무지한 상태에서 육아를 했던 나에게 교육의 거장들이 하는 이야기는 큰 충격과도 같았다. 육아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순간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첫째가 4살에 접어들면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밥을 잘 안 먹으려 하고, “엄마 미워”라는 말을 자주 하고, 밤에는 잠을 안 자고 싶어 하고, 지칠 때까지 놀고 싶어 했다. 동생이 생기면서 엄마 젖을 동생과 함께 먹고 싶어 했고, 한 시도 나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밤에 눈 감기 전까지 늘 엄마를 찾았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 일(?) 본 후 화장실 변기에 조금이라도 오래 앉아 있으면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내 아이의 목소리. 너무 힘들었다. ‘미운 네 살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 시기가 온 건가’라는 생각에 아이가 정말 밉기도 했다. 그러던 중 만난 육아 고전들은 나를 깊이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힘들었던 건, 내 아이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는 나의 시선 때문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창조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러나 사람의 손을 거치며 모든 것이 타락한다. 사람은 어떤 것도 자연이 만들어 놓은 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다. 마치 조련사를 길들이듯 사람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치 정원의 나무를 기르듯 자기 방식대로 사람을 기르려고 한다. ….


<에밀의 첫 부분 중에서>



18세기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이며 교육론자인 장 자크 루소를 만난 건 내 인생에 큰 행운이었다. 너무 거창하다 싶을지 몰라도 정말 그렇다. 루소의 <에밀>을 읽으며 21세기를 살아가는 내 가슴도 뜨거워지는데 절대 왕정 시대를 살았던 18세기 사람들은 어땠을까. 이 책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자 한 줄기 빛과 같았을 것이다. 아이들 대한 인권은 고사하고 아이들이 ‘작은 어른’ 취급을 받던 시대. 이 교육서는 출간되자마자 세상을 뒤흔들었다. <에밀>이 프랑스 대 혁명의 불씨가 되고 당시 금서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루소의 <에밀>을 만나고 나는 무려 250년 전에 지금 봐도 놀라운 교육관을 펼친 사상가가 있다는 것에 놀랐고, 이러한 교육서가 나온 지 200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우리의 교육 현실과 아이들에 대한 인식은 이보다 훨씬 뒤처져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어쩌면 우리는 ‘어린이’라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아이를 키우고 있는지 모른다.


루소가 <에밀>에서 강조하는 것은 ‘자연, 경험, 자유’다. ‘도시는 인류의 무덤이다’라는 말로 자연의 중요성을 설파한 루소는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놀고 관찰하고 경험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아이들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큰 스승이다.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그 과정은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고 성장하는 삶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그러나 너무 단순하고 당연하기에 우리는 이 진리를 그냥 지나쳐 버리는지 모른다. <에밀>을 읽고 아이들에게 자연을 돌려주고 싶었다. 시멘트로 뒤덮인 답답한 도시와 아파트 공간에서만 지내는 아이들이 아닌,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고 숨 쉬는 아이들로 자라게 하고 싶었다. 자연과 함께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에밀>을 만나고 세운 가장 첫 번째 육아 원칙이다.



‘최고의 행복은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있다. 이것이 나의 원칙이며 교육에 접목시켜야 할 핵심이다.’ ‘아이들에게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라..’

                                                                 <에밀 중에서>



이 대목을 읽으며 과연 우리 아이들에게는 얼마만큼의 자유가 있을까 생각해 봤다. 아니, 과연 아이들에게 자유가 있기는 한 걸까. 조기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이 학원 저 학원을 전전하며 부모의 못다 한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희생당하고 있는가. 부모들은 ‘다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진정 아이를 위한 것일까. 교육이라는 단어 아래 부모들은 자신의 욕망을 감추고 있는 건 아닐까.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아니 솔직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은 점점 시들어 갈 것이다. 아직 어리기에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조차 알지 못하고 주장하지 못하는 아이들. 부모는 아이들에게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 놀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해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가 허용한 그 자유 안에서 스스로 하고 싶은 것들을 선택하고, 배우고 싶은 것들을 경험으로 알게 된다. 그게 진정한 교육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나 역시 혹여나 아이를 위하는 마음으로 하는 모든 것들이 아이의 진정한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지, 에밀을 만난 이후 스스로를 계속 돌아봐야 했다. 내 내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나의 욕심을 직면하는 작업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나의 욕심을 알아차리고 걷어낼수록 내 아이들의 눈빛은 더 살아나고 빛이 났다.


장 자크 루소 이후 만난 마리아 몬테소리, 페스탈로치 등 교육계의 거장들은 내가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나만의 철학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었다. 육아라는 어쩌면 길고도 어려운 레이스에서 잠시 길을 잃을 때면 <에밀>을, <몬테소리 평전>을, 때론 <페스탈로치가 어머니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꺼내 다시 들추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시류에 편승하여 ‘몇 살에는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누가 만들어 낸지도 모르는 세상의 시간표에 내 아이를 끼워 맞추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길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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