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대중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관념, 의식 들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심지어 모범생이었다. 어찌 보면 이 사회, 기득권들이 좋아하는 말 잘 듣는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소수보다는 다수의 편에 서는 게 편했다. 어떤 일에 문제제기를 하고 비판 의식을 갖는 것보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적어도 욕은 안 먹었다. 그렇게 12년, 대학까지 16년의 학창생활을 하며 말 잘 듣는 사회 노동자로 성장했다. 언론고시를 준비하며 그나마 누군가의 관점이 아닌 나의 시각을 갖는 연습을 할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프레임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듣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지금 돌이켜 보면, 첫째를 낳은 후만 해도 나는 내 생각이 없었다. 생각을 강요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라에서 무상 보육을 해 준단다. 그럼 당연히 이용해야지’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실제로 기관에 보내는 게 더 금전적으로는 더 이익이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가정 보육을 해서 받는 보육료보다 기관에 다니며 받는 보조금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관에서 아이를 맡아주는 그 시간 동안 엄마는 직장에 가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으니 기관에 보내는 걸 부모들이 선호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럼에도 마음 한 켠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했다. ‘내가 어릴 때도 6세, 7세 때 기관 생활을 시작했는데 너무 어린것 아닌가’라는.
그러다 둘째가 태어나고 첫째가 4살이 되면서 첫째는 어린이집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육아서를 읽으면서, 교육에 대한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는 조금씩 나만의 시각을 갖기 시작했다. 육아서는 育我書였다. 나를 돌아보고 내 의식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고 누군가의 얘기에 흔들리며 불안해하기보다 내 아이를 먼저 생각할 수 있었다. 취학 전,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놀이학교 등은 남들이 다 다닌다고 내 아이 역시 가야 하는 건 아니다. 내 아이가 기관 생활보다 집을 더 좋아하면 집에 있게 해도 된다. 취학 전 모든 기관 생활은 의무가 아닌 선택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부모 세대가 어렸을 때, 아니 그 전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엄마와 집에서 생활했다. 물론 이제는 시대가 변해 맞벌이 가구가 많아지니 아이들이 기관에 가는 시기가 앞당겨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어릴 때부터 기관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의무가 아닌 선택이라는 말을 계속하는 이유는 아이가 엄마와 집에서 함께 하기를 원하고 기관에 보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다들 보내니까, 안 보내면 내 아이만 사회성이 떨어질까 봐 등의 이유로 일단 남들이 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4살에 어린이집 생활을 시작한 첫째는 낮잠 자는 것을 싫어했다. 원래 2~3살 때도 잠이 별로 없어 낮잠은 고사하고 밤에 잠드는 것도 오래 걸렸기 때문에 '과연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잘 잘 수 있을까' 했는데 역시나였다. 다른 친구들은 점심 식사 후 모두 잠들어 있는데 내 아이는 잠이 안 온다고 해서 따로 구석에서 조용한 놀이를 하거나 책을 보고 있다고 했다. 한 번은 일찍 가보았는데 첫째는 다른 친구들에게 방해되지 않기 위해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에 의지한 채 책을 보고 있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그 시간에 아이들이 오전에 생활한 내용을 기록하고 다음 업무를 준비해야 하기에 혼자만 깨어 있는 아이를 따로 돌봐줄 여력은 안되었던 것이다. 4세의 경우 선생님 1명 당 아이 7명을 돌봐야 하기에 각기 다른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성향을 배려해 주기 어려운 것이 현 어린이집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첫째는 9시 반에 등원해서 점심 먹은 후, 낮잠 시간 전인 12시 반쯤 하원을 했다. 약 세 시간 정도 오전 놀이를 하고 오는 것이었다. 하원 후에는 둘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첫째는 손을 잡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오전 어린이집 일정 이외에는 다른 스케줄이 없었기 때문에 마트에 들어가서 한 참 동안 낙지나 오징어를 구경하기도 하고 마트 사장님과 바다 생물에 대한 난상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산책로 벤치에 앉아하염없이 개미를 구경하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모아 새 둥지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야말로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나면 집에 와서 마트나 산책로에서 봤던 개미 책, 낙지 책을 읽어 주었다. 아이는 본인이 실제로 본 생명체들을 책으로 확인하니 너무 신기해하며 좋아했고 그때 즈음부터 더 많은 책들을 읽고 싶어 했다. 자연 관찰책들은 물론이고 앤서니 브라운, 존 버닝햄, 토미 웅거러 등 그림책의 거장들의 작품들을 접하며 “또! 또”를 계속 외쳐댔다. 좋아하는 책들은 몇 번씩 반복해서 읽었고 짧은 문장이 있는 책들은 내용을 줄줄 외기도 했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은 아이는 밤이 되면 더 눈이 반짝였다. 졸리지 않는다는데 9시만 되면 억지로 재웠던 지난날, 한 시간 넘게 자는 척하다 폭발한 적이 많았던 나는 이젠 그냥 아이의 욕구를 따라가기로 했고 그러다 보니 9시 를 훌쩍 넘기는 날들이 많아졌다. 한 시간 넘게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같이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어느 날은 가위질만 같이 해대기도 했다. 그러면 둘째는 옆에 있다 스르르 혼자 알아서 잠이 들었고 본인의 욕구가 원 없이 충족된 첫째도 어느 순간엔 졸리다며 잠을 청했다. 아이들의 욕구를 따라가면서 몸은 힘들었지만 억지로 재우며 서로 승강이하고 화내며 재우던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은 더 편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늦게까지 원하던 걸 하다 보니 아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힘들어한다는 점이었다. 등원 시간은 조금씩 늦어졌고 10시에 등원했다 2시간 만에 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아침에 두 아이를 깨워서 준비하고 첫째를 보내고 나면 금방 하원 시간이 되어 데리러 가야 했다. 둘 다 집에 데리고 있는 것보다 더 바쁘고 손이 많이 갔다. 아이도 어린이 집에 가는 것보다 집에서 자유롭게 생활하고 싶어 했다. 당시만 3세인였던 첫째는 발달 단계 상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놀기보다 개별 탐색을 많이 하고 자아 중심적인 시기였다. 이러한 연령별 특성과 아이의 성향을 고려할 때 기관 생활 보다 가정 보육이 아이들에게 더 유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여러 상황들을 고려하여 약 10개월 정도 되었던 어린이집 생활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5세 3세 두 아이들과 함께 하는 가정 보육 생활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이 아이들이 기관 생활을 시작하는 시기에 나와 내 아이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대중에 속했을 때 편안함을 느꼈던 나로선 당시 이러한 선택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로버트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인적이 드문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나와 아이들의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