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 기반 투자, 투자섹터, 심사역의 내러티브
본래 브런치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글을 쓰는 창구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나 또한 그렇게 사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과 일상에 치이다 보니 정돈된 글을 쓸 시간이 많지 않아서 매번 글감만 쌓고 글을 잘 발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의 일과 생각을 정리할 겸 신변잡기적이긴 하지만, 회고라는 이름으로 1~2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래도 나름의 뾰족함을 유지해야 하기에 벤처캐피털의 투자심사역이 겪은 일과 생각을 중심으로 적어보겠다.
1. 스타트업 투자 몇 년 뒤의 미래를 봐야 할까?
스타트업 투자는 결국 투자금을 회수해야 끝난다. 따라서 현재의 투자를 언제 회수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즉 회수한다는 것은 해당 투자 건이, 해당 스타트업이 성공했다는 의미이다.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이 기업이 목표로 한 시장, 갖고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 (회사 말대로) 어느 정도 미래에 작동할지 예측하는 게 중요하다.
스타트업의 단계별로 고려해야 할 미래의 시점이 달라진다.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는 7~8년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며, 중기 단계의 스타트업을 투자할 때는 3~4년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며, 후기 단계의 스타트업은 1~2년 이후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후기 단계 투자는 이미 이익이 나고 있을 확률이 높아 재무적인 접근이 더욱 중요하다.
상대적으로 초기, 중기 스타트업 투자할 때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많이 필요하다. 상상력은 캐주얼한 표현이고 정확히는 가설이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 스타트업 투자는 가설 기반의 투자일 수밖에 없다. 재무적으로 초기, 중기를 접근하기는 어렵고, 사람, 시장, 비즈니스 모델을 보고 투자해야 하는데 그중에서 시장을 먼저 봐야 한다. 세 가지 다 봐야 하지만 시장에 대한 가설은 스크리닝 역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스타트업이 싸우려는 전장이 향후 도래할 미래에서 유리한 전장이면 전장일수록 높은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미래에 대한 가설에 부합하는 곳 중에서 사람, 비즈니스 모델까지 부합하는 곳에 투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2. 나는 어떤 섹터를 봐야 할까?
공학도 출신의 투자심사역이 소비재 브랜드로 큰 회수를 하고, 인문계열 출신의 투자심사역이 바이오 기업으로 큰 회수를 하는 것이 벤처캐피털의 현실이다. 물론 자신의 배경과 실제 투자가 일치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바이오 심사역 빼고는 그런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는 개인의 전문성과는 별개로, 운용하고 있는 펀드의 주목적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함께 딜을 검토해야 하는 시니어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작년을 마무리하며 능력범위라는 투자의 기준을 유지하면서, 내 주위 현실을 고려해서 다양한 딜을 검토하고 투자하기 위해 섹터를 넓히기로 올해 결심했다. 그래서 2개월 정도 10과목 이상의 고등학생 내신 챙기듯 다양한 섹터를 보았다. 주마간산 식으로 보다 보니 무언가 쌓이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기존 내가 해온 영역인 유통과 소비재를 보기에는 투자금이 잘 모이지 않는 지금의 시장상황상 발견하기 어려운 딜이다. 결국 여러 섹터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그나마 해보려는 것은 소비재/유통 이외에 2~3가지 정도 섹터에 집중해 보는 것이다. 어쩌면 특정 섹터에 대한 가설을 갖고 접근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동료이자 업계 선배인 심사역이 스타트업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이 어떤 가설을 갖고 있는지 설명하는 글을 보았다. 감명 깊었다. 나 또한 나중에 그것을 따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것을 쓰기에 얄팍한 지식이기에 일단 열심히 부딪혀 보고 내 섹터와 내 가설을 만들어야 겠다.
3. 나는 어떤 심사역이 되어야 할까?
내가 어떤 심사역이 될지는 향후에도 정해질 부분이겠지만, 동료 심사역을 만날 때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경험을 갖고 있는지'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투자심사역 중 특이한 경력인 유통업 MD 출신이기 때문에 신기해하기도, 약간의 낯섦을 보내기도 한다. 회사 이름만 듣고 '전략기획 쪽에서 일하셨겠군요' 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
MD, 바이어라는 직무가 장기적으로 내게 맞지 않음에, 일이 재밌지 않기에 투자 일로 넘어와서 해당 출신이라는 것이 내 내러티브가 되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거기에 짜치게 원래 나는 MD를 하려고 유통업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전략 직무로 들어갔는데 대기업의 일방적 인사 배치로 직무가 바뀌었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좋은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서민을 위한 건강한 먹거리를 유통하겠다는 큰 꿈도 품었던 내게 할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통업 MD 출신이라기보다는 소비자를 깊게 이해하는 투자심사역이라고 내러티브를 가져가고 싶다. 적어도 6년 간의 경험동안 내가 배운 것은(좋은 사례든, 반면교사이든) 소비자와 멀어지면 기업은 망한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귀신같아서 처음 몇 번은 속아줘도 결국에 소비자 중심의 기업이 아니면 멀어진다. 점포에서 다양한 고객을 마주한 것, 다양한 오퍼레이션을 하며 수많은 점포 담당자와 소통한 경험은 어디 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유통업에서 경험했기에, 소비자랑 가까웠기에 소비자를 깊게 이해하는, 기업과 소비자의 여정을 잘 파고드는 투자심사역이라고 내 내러티브를 만들어야겠다. 실제로도 투자 심사를 할 때 소비자의 반응을 자주 묻고, 내부 직원의 반응을 살피려고 노력하고 있다.
4. 정보의 과다
정보의 과다를 진정 경험하고 있다. 본래 상장주식을 투자했기에 투자 관련 정보와 투자 관련 책은 읽어왔다. 거기에 현업에서의 정보까지 합쳐지니 가끔 머리를 많은 정보가 콱 틀어막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1월에는 꾸역꾸역 밀어 넣었는데 이게 과연 좋은 지식, 지혜로 이어질까 의구심이 들어서 2월에는 조금 거리를 두었다.
틈틈이 정보의 창구를 줄이는 데 신경을 쓰고, 인풋만큼이나 내가 아웃풋을 내고 있는지 고민해 본다. 꼭 일의 성과라기보다는 내게 들어온 정보를 내가 능동적으로 활용하고 있는지의 의미다.
브런치를 그런 창구로 쓸 줄 알았는데 브런치 글에 대한 심적 허들이 있어서, 최근에는 10가지 정도 잠들기 전에 정보 배출을 해보고 있다. 소화가 된 정보 중에 먼저 떠오른 것들을 단상과 함께 적어본다.
정보는 앞으로도 엄청 많이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보만 읽다가 시간을 다 허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비어있는 시간을 만들어 정리하고, 이미 본 정보와 지식을 곱씹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적은 정보를 가졌던 옛사람들 중 커다란 지성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정보의 홍수가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5. 현 정치에 대한 생각
투자와 직접적 관련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지만, 행정부의 마비가 곳곳에 미치는 영향은 벤처캐피털에도 예외는 아니다. 어떤 생각에 대한 옳고 그름에 따지기보다는 이 사태가 조속히 잘 마무리되어 가뜩이나 낮은 성장률이 예측되는 우리나라가 좀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또한 직업으로서 투자자 만큼이나 일상에서의 교양인은 내게 중요한 정체성이다. 작금의 사태에 아무 의견을 내지 않는 것도 교양인으로서 적절한 자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막연히 상대를 어떤 이념으로 지칭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적어도 고등학교 사회, 윤리와 사상을 배웠던 나로서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자유주의와 권위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립하는 개념들임을 알고 있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서로를 양극단으로 몰아넣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는 지양해야 한다.
이 사태가 조속히 끝나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이 사태가 수습된 이후에도 과연 양극단으로 분열된 사회가 다시 화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짜뉴스가 만연하여 정확한 진실을 알기 어려우며, 알고리즘으로 자신이 믿음을 더 강화하는 일이 많다.
나 또한 언제든 틀릴 수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중용, 유토피아는 어쩌면 극단이 아니라 적절한 균형점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