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명견만리 '외로움'에 대한 편을 TV로 보았다.
다 본 뒤 한 문장이 기억에 남았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관계에서까지 효율성을 따졌기 때문에 우리는 외로워졌다."
이 문장을 들으니, 여럿이 약속 장소를 정할 때 각자 집에서(또는 출발지에서) 동등하게 떨어진 곳을 선택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는 언제부터 삶에서 이렇게까지 효율성을 따지게 되었을까?
먼 옛날이라고 효율성을 따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삶의 모든 부분에서 효율성을 점점 더 추구한 것 같다.
먼저 우리는 일에서 효율성을 찾기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학문인 경영학의 정의처럼 한정된 자원(물질, 시간 등)을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목표를 이루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고민해야만 했다.
우리는 효율성에 대한 척도를 퇴근하고도 삶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러면서 여가와 관계까지 효율성의 척도로 바라보게 되었다. 삶을 효율성이라는 척도로 보다가 갑자기 집에 왔다고 이를 바로 잊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인간은 원하는 대로 모드를 바꿀 수 있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일이 아닌 다른 삶의 단면에서 효율성을 추구했을 때 장점도 있다. 우리는 철저한 가격비교를 통해 물건을 구매하고, 리뷰를 통해 우리가 갈 식당을 평가한다. 제일 빠른 길과 제일 빠른 환승을 어떻게 하는지 알아 목적지에 빠르게 간다. 여가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도록 시간을 계획한다.
하지만 효율성 덕분에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그 만남에서 할 이야기보다는 우리 집에서 가장 적게 시간을 들여 갈 수 있는 곳인지, 가격에 비해 만남의 장소가 괜찮은 것인지, 돈은 어떻게 합리적으로 나누어 낼 것인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결정하기가 어렵고 귀찮으면 효율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만나기보다는 비대면 소통(카카오톡)으로 하는 일도 많아졌다.
그래서 투입량(시간, 노력, 돈)에 대해서는 확실히 효율적이지만, 과연 산출량(만나서 하는 대화, 함께 하는 경험)도 효율적인지 장담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의 여가와 관계는 겉으로 보기에 효율적이지만, 내부로는 피상적이 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고, 사람과 (빠르게) 연결되기 위해 SNS를 하고, 모바일 메신저를 한다. 사실 SNS와 메신저를 계속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한데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미 자본주의가 무르익었고 효율성이 전 분야로 스며든 선진국에서는 외로움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일례로, 영국은 외로움부를 만들었고 외로움을 사회적 문제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외로움부가 별도로 없는 우리 사회에서 우리 각 개인이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일이 아닌 곳에서, 여가와 관계에서, 효율성을 찾지 않으면 된다.
내가 좀 더 돈을 내고, 시간을 투자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과 그 시간이 만들 추억에 대해 집중해야 한다.
2020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나도 관계에서 효율을 찾지 않고 무척 비효율적으로 다양한 관계를 맺어야 행복할 수 있다.
*참고
1) KBS 명견만리 외로움 편
2) 영국 외로움부에 대한 기사
https://news.joins.com/article/22296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