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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유인간 Mar 28. 2020

백만장자의 삶, 퇴사의 이유

백수가 된 지 두 달째의 일기

부자가 되면 어떻게 살고 싶어?


내가 알기로 우리 부모님은 항상 빚이 있고 빠듯했으므로 나는 가끔씩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상상해보곤 했다. 


애매한 질문이니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그럼 재산이 얼마이면 부자인가? 나를 포함한 평범한 직장인들은 걱정 없이 먹고 살만큼 돈만 있으면 회사를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종종 온다. 좋아, 실마리다. 그렇다면 회사를 때려치울 만큼의 돈은 얼마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심심풀이로 꺼낸 질문에 답해준 주변의 지인들 말을 종합해보니 웬만한 사람들은 100억 원이 있다면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 이하는 부자가 아니란 말이 절대 아니다. 당연히 내 기준으로 엄청 부자다. 다만 웬만한 사람들이라고 스펙트럼을 넓게 가정하기 위해서 잡은 금액이다.) 


- 돈만 있으면 내가 이 일 안 한다. 
- 그럼 뭐할 거야? 
-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지.
- 하고 싶은 일이 뭔데?


그렇다면 내가 진짜 100억 부자가 됐다고 치고, 이제부터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면 좋을까?라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본다. 


어떤 책에서 진짜 부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한 사람의 삶을 흉내 낸다는 말을 보았다. 기억에 남는 예는 요트다. 굳이 엄청나게 비싼 요트를 사서 선원들이 할 뱃일을 스스로 하고, 요리사 대신 요리도 하고, 청소부 대신 치우고 정리하고 등등. 평소에는 바쁜 자신을 대신해 누군가 해주는 일을 굳이 휴가를 내어 스스로 한다는 것이다. 


나는 물욕은 별로 없되 경험욕은 많다. 흔한 명품 백 하나 사고 싶은 적 없지만, 대신 여행 다니거나 운동 다니거나 가죽공예처럼 뭔가를 배우는 데에 돈을 써왔다. 그러므로 나는 부자가 된다면 아마 뭔가를 수련할 것이다.


그 뭔가에는 몇 가지가 있을 텐데, 우선 몸을 수련할 것이다. 내 맘대로 100퍼센트의 컨디션으로 움직이는 건강한 신체를 지니고 오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회사에 다니면서도 정기적으로 수영, 필라테스, 요가 등 운동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 운동을 하며 신체를 단련하면 좋을 것 같다.  


두 번째로는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일을 할 것이다. 나는 손을 쓰는 것을 좋아해서 뜨개질, 요리, 바느질, 그림, 가죽공예 등을 종종 한다. 현재는 좀 더 구체화되어서 도예를 진지하게 해 볼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쉽게 타올랐다 쉽게 꺼지곤 하는 나를 잘 알아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셋째로는 아마도 깊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다듬어 글로 남기기를 시도할 것이다. 말하기보다는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편이고, 나는 아이도 없어 또래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으므로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 게 세상에 남아 누군가와 공감대를 이루고 한 명에게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이런 것들을 일반적으로 수련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오랜 기간 꾸준히 단련해야 하는 것이므로 어울리는 말인 것 같다. 이 외에는 독서, 매일 아침밥 차려먹기, 미드 실컷 보기, 청소와 정리, 여행, 서핑과 같은 것들을 하고 싶다. 


그런데 늘어놓고 보니 이것들은 사실 대단한 돈이 드는 것들이 아니다. 삶을 영위하려면 어느 정도의 생활비가 필요하긴 하지만 이런저런 비용을 감안해도 100억 부자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국가대표에게 운동 레슨을 받는다거나, 해외로 도예 유학을 간다거나, 글쓰기 위한 장비를 구입한다거나 하면 생각보다 많이 들긴 하겠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까지 전문적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렇다면 뭘 망설이고 있는 걸까? 기를 쓰고 100억에 당도하여 결국 저 일을 하려는 것이라면, 지금 당장 못할 이유가 없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 1년 반 동안 주말부부를 했다. 회사 분위기가 자유로운 편이라 일주일에 며칠씩 재택근무도 할 수 있어 실제로 떨어져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부부 생활로 인해 내가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 순간은 대단한 사건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었다. KTX를 타고 출근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날 때, 기차 옆자리에서 시끄럽게 코 골면서 주무시는 아저씨를 만날 때, 혼자 저녁밥을 사들고 어두운 밤거리를 지나 아무도 없는 집에 갈 때와 같은 수많은 소소한 일상에서 온다. '내가 지금 뭘 위해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지?', '내 짧은 인생을 이렇게 소모해버려도 되는 것인가?'와 같은 생각이 지속적으로 밀려온다. 


이런 고민의 시간을 약 1년 정도 보내며 결심이 굳어진 것 같다.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언젠가 올지도 모르는 그날을 위해 현재를 소모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앞서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나는 운 좋게도 이미 당장 백만장자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백만장자가 되어서 하고 싶은 일에 큰돈이 들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된 지 이제 거의 두 달이 되어간다.  

지금은 위에 언급했던 내 백만장자의 삶을 천천히 즐기고 있다. 느리게 이것저것 기웃거리며 나 스스로를 간 보면서 내 삶의 방향성을 다져나가고 있다.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하루에 두세 시간 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이틀마다 한 시간씩의 운동도 겨우 하고 있다. 인간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여유를 좀 부려보도록 한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일상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는다. 그것 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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