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된 지 7개월째의 일기
나는 범생이다. 표준 분포로 보면 상위 10%, 아니 5% 쪽에 들 것이다. 학창 시절엔 열심히 공부했고 명문대에 들어가 대기업에 취직했다. 회사는 자율 출퇴근제에 자유로운 분위기였음에도, 스스로 만든 규칙적인 패턴을 지키면서 다녔다.
남들이 보면 타고난 모범생이지만 정작 나는 그 생활이 쉽지 않았다. 실상 내 본성은 게으른 탓이다. 예를 들면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아침에 쉽게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주말엔 늘 정오를 넘겨야 일어나곤 했다.
본성이 게으른 자가 모범생으로 살았던 이유는 일종의 강박 때문인 것 같다. A학점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 때가 되면 진급해야 한다는 강박, 다른 사람에게 욕먹기 싫다는 강박 같은 것 말이다. 욕심이 아니라 강박인 이유는 이걸 뭔가에 써먹어야겠다는 동기에서 나온다기보다 순전히 자기만족에서 그치기 때문이다.
대학교 졸업과 대학원 진학 사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소속된 조직이 없었던 때가 6개월 정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행복한 청춘이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너무 불안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도 되는가.', '앞으로 나는 이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직업을 구하고 돈을 벌 것인가.'와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온통 쉬지 않고 떠올라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불안감에 휩싸여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버린 것이다. 놀 때도 불안하고, 밥 먹을 때도 불안하고, 친구를 만날 때도 불안했다.
그런 나를 알기에 그것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던 나는 퇴사 후 '무슨 일을 해서 먹고살 것인가.'보다는, '내 소중한 일상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준비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또다시 같은 불안에 휩싸여 일상의 기쁨을 놓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하여 돌이켜보니 '어쨌거나 범생이'인 나는 퇴사를 위해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첫째로는 먼저 퇴사한 회사 동료나 친구들을 찾아가 진솔하게 물어봤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잠잘 때까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경제적인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하는지, 가장 아쉬운 점과 좋은 점은 무엇인지, 회사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있는지 등이다. 예상 가능하거나 당연한 대답이라도 그것이 실제 경험에서 나온 것이므로 나에게 대입해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과거 전적이 있으므로, 해야 할 일이 없더라도 불안하거나 지루해하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는지 테스트해보아야 했다. 추석 연휴에 개인 연차를 붙여 약 2주 동안 휴가를 어렵게 내고 베트남으로 떠났다. 딱히 여행을 한 것은 아니었다. 호이안에서 2주 동안 홈스테이에 머무르며 특별히 할 일 없는 나날들을 보내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1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일상을 잘 보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유롭게 보낼 수 있는 여가시간 동안 트립어드바이저에 식당과 카페 후기를 아주 열심히 남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첫 회사에서 8년 동안 근무했기 때문에, 매일같이 나가기 싫은 몸을 이끌고 억지로 일어날 때마다, 이게 이 회사에 질려버린 것인지, 일에 질려버린 것인지 헷갈렸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정년퇴직에 대한 환상이 있었기 때문에 일 자체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회사에 질려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4년에 이 메모를 남겼을 때부터 이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몇 년 동안 이직할 회사를 찾아보았고, 드디어 마음에 맞는 곳을 만나 2018년에 회사를 옮겼다. 스타트업이라 작고 유연하고 젊었다. 이전 회사와 많은 것들이 반대였다. 처음엔 모든 것이 새로웠다. 회사 가서 새로운 툴과 시스템에 익숙해지고, 점심시간에 식당을 찾아다니며 밥 먹고,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도 즐거웠다. 대기업에 비해 전체 프로세스를 내가 진행해야 하니 일에 대한 자신감도 붙었다. 그런데 회사는 회사인지라, 예전 회사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면이 보이면 나는 바로 질려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들어진 ‘직급 체계’ 같은 것 말이다. 기존엔 없었는데 필요해져서 만들었다고 한다. 필요하다는 취지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그런 면이 보일 때마다 '내가 여기서 뭐하는 것이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퇴사하기 전, 6개월가량 재택근무를 했다. 사실 의도한 것은 아니고 퇴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조금 더 있어보라고 기회를 준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회사에 나가기 싫은 것인지, 이 일이 싫은 것인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일주일에 이틀만 출근하고 사흘은 집에서 일했다. 누군가는 자유롭고 좋았겠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앞서 말했듯 범생이 기질의 나는 출근이나 재택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스스로 만든 어떤 강박 같은 것을 지켜야 했다. 즉, 재택근무로 회사를 다니는 것은 그냥 회사를 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퇴사하면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경우는 ‘서울’이었다. 주말부부였으므로 퇴사 후 남편이 있는 대전으로 이사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들도 대부분 서울에 있고, 갤러니나 미술관, 핫플레이스, 식당, 카페, … 좋은 것들은 왜 다 서울에 있는지. 대전으로 가게 되면 외식도, 카페도, 갤러리도 서울만큼 쉬이 갈 수 없다. 친구도 만나기 어렵다. 때문에 퇴사를 결심한 후, 나갈까 말까 고민될 때면 최대한 집 밖으로 나가는 쪽으로 결정했다. ‘질리도록’ 서울의 인프라를 경험하고 질려버리기 위해.
원래 나는 게으른 집순이 기질이 강해서 주말에도 웬만하면 밖에 잘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외식보다 집밥을 좋아하는 편이므로 평소 식당이나 카페도 잘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취직하고 서울에 10년 동안 살았지만, 마지막 6개월 동안에 그 전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나돌아 다녔던 것 같다.
일상을 행복하게 이어나가기란 백수에게도 다른 모든 이의 인생 목표처럼 어려운 것이다. 다행히도 몇 년 동안의 꾸준한 준비를 통해 행복한 백수 생활을 7개월째 잘 보내고 있다. '제2의 인생 계획'과 같은 거창한 준비가 아니라 일상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통한 준비 말이다. 이런 준비가 없었다면 나는 십여 년 전의 그때처럼 불안하고 불행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역시 준비된 백수가 잘 놀 수 있다는 것이 오늘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