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되기 한 달 전의 일기
나는 특이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너는 참 너다."라던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특이한 애야.", "너처럼 그런 말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와 같은 소리들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인생을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튀는 선택 없이 평범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아마 내 의지와 관계없이 그다지 평범치 않던 어린 시절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태어나 2녀 중 장녀로 자랐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불처럼 싸우곤 하셨고, 잠시 별거와 이혼의 위기를 겪었다 다시 결합하셨다. (여전히 꽤 싸우신다. 한때는 이런 부모님을 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줄 알았으나 지나고 보니 이 또한 평범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병으로 부모님은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귀촌하였다. 당연히 나 역시 초등학교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친구들과 눈물을 머금은 이별 후 깡촌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곧바로 전교생 81명인 초등학교를 6학년 동기 23명과 함께 ‘서울에서 전학 온 아이’ 신분으로 졸업했다. (이 학교는 학생이 더 줄어 지금은 폐교되었다.) 이후 3년간 하루에 버스가 5번 다니는 이 깡촌에서 읍내로 새벽 첫차와 막차를 타고 왕복 2시간씩 비포장도로를 오가는 중학교 생활을 했다. 겨울에는 눈이 무릎까지 쌓이기도 했으며, 그런 날은 버스가 못 들어와서 택시를 타고 가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버스가 못 들어오는 날도 택시는 다녔다. 나는 택시도 못 다녀 학교를 빠졌으면 했으나 그런 날은 불행히도 없었다.
읍내에는 상고와 공고밖에 없었으므로 일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타 지역으로 고등학교부터 유학을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공부 머리가 좋은 편이었던 지라 지역의 과학고로 진학해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2년에 과학고를 수료하고 대학교에 입학했다. 학/석사를 마치고는 S전자에 들어가 스마트폰 관련 일을 8년 간 하다 퇴사하고 인공지능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다.
고등학교에서 만난 남자 친구와 첫 연애를 시작했고, 그 남자 친구와 12년을 사귀고 결혼했으며, 아이가 없는 결혼 6년 차이다.
역시 일반적으로 평범한 인생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이한 성격이라는 소리도 듣는 편이다.
왜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모든 선택의 순간에 '평범하게 잘 사는 것'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지 싶다. 아마 누구나 기본적으로는 그것을 바랄 테지만, 내 경우에는 조금 더 열망이 컸던 것 같다.
내 어린 시절의 가정은 ‘화목'과는 거리가 먼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격정의 7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두 분은 그야말로 격정적이셨다. 장남으로 자란 아버지는 학생운동으로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으며,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와 멋지고 열정적인 사랑을 키웠을 것이다. 가부장적인 80년대에 불같은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고 삶이 되었을 때의 모습은 내 기억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투병과 귀촌, 사기와 사업 실패 등으로 울적한 내 어린 시절이 지속되었고, 어떻게든 집을 탈출해 나만의 단출한 삶을 꾸리는 것이 매일의 소망이었다.
당시에 동경하던 사람은 바로 우리 둘째 이모였다. 이모네야말로 대한민국 중산층 행복한 가정의 표본이었다. 이모는 중학교 선생님이셨고, 이모부는 대기업 증권사 직원이셨다. 두 분은 정년퇴직할 때까지 직업을 아주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 탄탄함이 주는 안정감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나는 두 분이 싸우거나 심지어 다투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사실이었다. 사촌동생 결혼식의 주례사를 이모부가 하셨는데,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시인하셨다.
어렸을 적 손으로 꼼지락대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나는 화가, 또는 패션 디자이너, 공예가와 같은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내 고난의 시간(?)이 이어지면서, 내 꿈은 '이모처럼 사는 것'이 되었다. ‘직종’으로부터의 꿈이라기보다는 그런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직업으로의 꿈 말이다.
그래서 나는 '평범하게' 살아왔다.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모든 순간에 나는 ‘이모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을 염두에 두었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선택만을 해왔다. 속마음은 미술공부를 하고 미대를 가고 싶었으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당연한 루트를 따라 과학고에 진학했고, 동기의 절반이 2년에 수료하는 흐름을 타 함께 대학교에 진학했다.
같은 과 대학 동기와 선후배 중에는 창업을 하거나, 해외로 유학을 가거나,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등 범상치 않은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모처럼 평범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대기업에 들어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취직이 잘되는 UX 분야로 진로를 정해야 했다. 운이 따라주었으므로 다행히도 계획대로 대기업에 취직이 되었고, 그 생활을 꽤 오래, 8년 동안 유지했다.
내 선택은 한 번도 튄 적이 없었고 누구에게든 "왜 그렇게 결정했어?"라는 질문을 들어본 적 없다. 바라던 대로 안정적인 생활이었지만 결코 사는 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 괴로웠다. 회사가 문제인 걸까? 모르겠다. 그럼 다른 평범한 직장인들처럼 이직을 한 번 해보자. 이직을 신중하게 알아보고 남들처럼 이직도 했다. 그러나 내 모든 평범 테크트리를 완벽히 짜 맞췄음에도 이상하게도 인생이 그만큼이나 완벽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회사를 아예 퇴직하고 전업주부가 되려는 것이다. (이 글을 작성한 때는 작년 7월이다. 지금은 주부 백수가 된 지 8개월 차) 이것은 10년 전, 5년 전의 나라면 선택지에도 없었을 항목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내 테크트리를 모두 짜 맞췄지만, 인생이 그리 완벽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껏 나는 스스로 만들어낸 '평범하게 잘 살아야 한다'는 틀에 나를 가두고 20년 동안 핀트가 조금씩 안 맞는 선택을 해온 것인지 모른다.
제삼자가 보면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평범한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이 선택은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선택이다. 부모님을 포함한 주위의 모든 이들은 이 선택에 의문을 표시한다. 지금껏 난 '이모처럼 평범하게 잘 사는 삶'을 위한 선택만을 해왔다. 그런데 지금 하려는 이 선택은 전혀 다른 기준이다. 드디어 내 처음의 선택으로 돌아가 ‘속마음은 미대를 가고 싶었으나’의 수준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다.
과연 물리적 제약, 피해의식, 불행한 마음이 없는 상태의 나라면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이 선택의 시작이다. 아직은 딱히 진로에 대한 계획은 없다. 이 나이에 학교를 다시 다닐 용기도 없다. 그렇지만 20년 전, 중학생 때보다 훨씬 단단해진 지금의 나라면 남은 인생 동안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