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름, 완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모순』
이번에는 나름 베스트셀러 모음입니다. 읽고 싶은 책 위주로 읽다 보면 항상 한 박자 늦게 읽지만, 그래도 그래도 베스트셀러는 꼭 읽어보려 한다. 사람들이 공감하는 주요 스토리라인이나 정서, 셀링 포인트가 궁금하기도 하고. 최근에 읽은 책들 중 아마 SNS나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봤을 법한 책들을 한 번 모아봤다. 위 작품 중 인상 깊게 읽었던 세 작품을 소개할까 한다. 감상은 지극히 개인적이니 참고만 하시기를!
─ 김금희, 무제
사랑? 이, 사랑은 잃는 게 아니여. 내가 내 맘속에 지어놓은 걸 어떻게 잃어? (p. 212)
첫 번째로 소개할 책은 박정민 배우가 대표인 무제 출판사에서 출간한 '듣는 소설', 『첫 여름, 완주』이다. '듣는 소설'은 시각 장애인용 오디오북을 먼저 출간하는 소설 시리즈로, 시각 장애인'도' 읽을 수 있었던 기존 소설책과는 달리 비시각 장애인'도' 읽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이름이 없는, '소외된 것'들을 꾸준히 들여다보겠다는 출판사의 가치관이 담겨 있는 듯하다. 시각장애인은 국립장애인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열람 가능하고, 비시각 장애인은 오디오북은 윌라에서 들을 수 있다. (전자책처럼 단품 구입이 가능하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야, 자꾸 어른 어른 하지 마. 어른이면 뭐, 어른들도 실수하고 멍청한 짓도 하고 막막하고 그런 거야. (p. 85)
그리고 내가 니기 그렇게 강조하는 어른으로서 충고하는데 상처받았다고 남한테 막 상처 줄 수 있는 그런 특권 있는 거 아니야. 나 아프다고 면죄부 받는 거 아니라고. (p. 86)
주인공 '열매'는 자신의 돈을 갚지 않고 사라진 수미 언니를 찾아 그녀의 고향 '완주'로 간다. 마을에 도착했을 당시 열매는 금전적인 문제는 물론, 우울증과 성우임에도 목소리에 이상이 생기는 등 여러모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곳에 찾는 고수미는 없었고, 열매는 합동 장의사 겸 매점을 운영하는 수미 엄마의 매점에서 알바를 하면서 여름을 보내게 된다. 마을은 슬프지만 유쾌하고, 명랑하면서도 마음이 쓰린 곳이었다. 저마다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열매는 이상하게도 치유되는 기분을 느끼고, 수상한 청년 어저귀를 사랑하면서 "살아 있는 것들이 살아 있는 것들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157면)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한 약속은 하나밖에 없어. 기억하지? 아이에 두닷 바도키 바리미 바드 나카리. 슬픈 얘기는 하지 말자. (p. 167)
열매는 그곳에서 돈을 돌려받은 것도, 새로운 사랑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상실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수미 언니는 열매에게 돌려줄 돈 한 푼 없었고, 그녀가 사랑하던 예전 수미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열매는 수미에게 내가 아는 수미 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언니가 필요한 마을로 돌아가라고, 그리고 "슬픈 얘기는 하지 말자"(205면)고 한다. 그러니까 짧은 여름을 완주하고 다시 서울에 홀로 서 있는 열매는 그리 쓸쓸해 보이지가 않는다. "사랑은 잃는 게 아니"(212면)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마음에 어떤 사랑이 오래도록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김기태, 문학동네
나도 몰라. 어쨌든 들 거야.
송희는 바벨을 쥐었다. 딱딱하고 차갑다. 하지만 내 손안에 있는 내 것. 내 몫의 약속. (p. 261~262)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꽤나 오랫동안,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김기태 작가님의 소설집이다. 수록된 작품 중 「보편 교양」을 어디서 읽어 봤는데?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2024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재미있는 소설집. 작품의 배경이나 인물들의 대화, 사용되는 언어 등이 현 세대와 결이 맞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읽는 것을 추천한다.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p. 143)
앞서 언급했듯 이 책은 시대적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인데, 그중에서도 「보편 교양」은 교육계의 무기력한 현실을, 「세상 모든 바다」와 「로나, 우리의 별」은 음악계(아이돌 산업)의 파급력과 그에서 비롯되는 명암을 그려내고 있다. 특정 현상이나 사회를 비난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 안에서 위트와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치열하게 살아도 상처받고, 쉽게 이방인이 되는 사회 속에도 연대하는 사람들.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로나, 우리의 별」에서 아이에 붉은 도브를 건넸던 로나의 마음이, 표제작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 보여줬던 권진주와 김니콜라이의 작은 행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우리는 '모두'가 아니므로 당신의 하루를 모른다. 하지만 알고 싶다. 로나가 질문했듯, 만약 당신이 단지 생존하기 위해 그렇게나 일하는 데에 지쳤다면, 더 많은 삶을 사랑하고 창조하는 데에 쓰고 싶다면, 자신이 자유로운 인간인지 의심해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우리다. (p. 205)
무엇보다 마지막 작품, 「무겁고 높은」의 주인공 송희가 '영광'이나 '미래', '꿈'이나 '희망'을 들어 올리는 것보다 '100킬로그램'의 쇳덩이를 들어 올리겠다고 결심한 것이 좋았다. 송희는 비록 카지노가 들어선 폐탄광촌에 살고 전도유망한 선수도 아니라 곧 역도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지만, 그녀는 자신의 몫이 있다. 포기하기 위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 그 바벨은 송희의 것이고 그녀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곁에 있는 '젖은 머리'처럼 증인이 되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단지 당신이 당신의 몫을 다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그 곁에 있어주고 싶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다. "그럼 내가 증인이 될게."(262면)라고.
─ 양귀자, 쓰다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p. 173)
마지막 작품은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이다. 이 작품은 1998년 출간 당시에도 인기가 많았지만, 최근 역주행하면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책의 주인공 '나'(안진진)는 25세 미혼 여성이다. 그녀의 가족은 마냥 평범하지 만은 않았는데, 아버지는 술꾼에 떠돌이 생활을 하고 심지어 동생은 건달이어서 어머니가 시장에서 내복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안진진은 일란성 쌍둥이인 어머니와 이모의 인생을 곁에서 지켜보며 삶의 모순을 느끼게 된다. 지난하게 살고 있는 어머니와 달리 이모는 '평탄한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인다. 부족한 것 없는 남편 곁에서 아이들을 유학 보내는 삶. 하지만 이모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가 않았고, 어느 날 갑자기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283면)는 소식을 남기고 삶을 마감하게 된다.
나,
이제 끝내려고 해. 그동안 너무 힘들었거든.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참할 말이 없구나. 그것이 나의 불행인가 봐. 나는 정말 힘들었는데, 그 힘들었던 내 인생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것 말야. (p. 283)
이모의 삶은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에게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고, 누구와 결혼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었다. 먼저 '김장우'는 부모를 여의고 형과 의지하며 사는 "세상의 모든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102면) 가난한 사진사이다. 그의 곁에 있을 때는 가슴이 뛰었지만, 그녀는 그녀의 모든 것, 즉 자신의 가족사 등 인생의 어두운 면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이와 반대로 '나영규'는 가진 것이 많고 모든 것을 계획하여 철저하게 지키는 안정적인 사람이다. 그에게 그녀는 자신의 모든 부분을 보여줄 수 있었지만, 가끔은 그의 치밀함에 숨이 막히기도 했다. 그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녀는 이모와의 사별을 겪으면서 '나영규'를 선택하게 되고, 그를 통해 어떤 것을 구하겠다고 결심한다.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p. 176)
나는 나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똑같지 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나를 학대하지 않기로 했다. (p. 217)
인간은 그 누구라도 행복과 불행을 함께 느끼게 되고, 한 사람의 인생을 누구도 섣불리 결단할 수 없다. 안진진이 왜 사랑하는 '김장우'에게 가지 않았을까. 안진진은 '나영규'가 줄 수 있는 것, '이모'의 삶. 그들의 행복과 불행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무책임한 가정 폭력범인 아버지의 천성과 아픔을 생각한 것, 그녀의 어머니가 중풍과 치매에 걸려 돌아온 아버지를 돌보면서 생기를 되찾은 것, 내가 이런 것들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다 무용한 일이라고.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296면)기 때문에. 그게 인생이라면, 우리가 수많은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가야만 한다면, "나를 학대하지 않"(217면)는 마음만이 우리를 삶에서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 향한다. 슬프고 아픈 나날이지만, 그 마음을 잘 보듬어 주었으면 좋겠다. 꼭꼭 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들을 자꾸 꺼내면서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이건 "그런 슬픈 얘기" 대신에 전하고 싶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