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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 기록

언젠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파과』, 『파쇄』, 『3월의 마치』

by 박은영


SE-2332f110-879b-41a7-a0a3-3d59babdf76b.jpg?type=w1 해당 포스팅은 책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병모 작가님의 『파과』가 영화화가 되었다고 하여 오랜만에 다시 읽어봤다. 아마 영화는 잔인해서 못 보지 않을까 싶지만… 그리고 『파쇄』가 그 후속작(외전)이라고 하여 바로 찾아서 연달아 읽었다. (왜 몰랐지) 그리고 최근에 읽은 책 중에 노년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이 하나 더 있어 함께 기록할까 한다. 이 작품들을 읽고 있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노쇠와 상실이 애잔하면서도 어쩐지 슬프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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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과

─ 구병모, 위즈덤하우스



"그러든가.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너도 나도, 지켜야 할 건 이제 만들지 말자." (p. 244)



『파과』는 예순다섯의 나이에도 현장을 뛰고 있는 여성 청부 살인 업자 '조각'이 주인공이다. 그녀는 40여 년간 냉철한 킬러를 자처하며, 일명 '방역' 작업을 완벽하게 해낸다. 그런 그녀에게도 노화가 찾아온 건지, 몸도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마음 한편에 걸리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 그녀는 어린 시절 자신을 혹독하게 훈련시킨 '류'와 큰 상실을 겪으면서 "지켜야 할 건 이제 만들지 말"(244면) 자고 결심했었다. 이렇게 그녀의 사랑은 류와 함께 했던 과거에 멈춘듯했지만, 그녀는 자신을 구해 준 '강 박사'에게 남다른 마음을 품게 된다. 심지어 나중에는 그녀의 딸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자처하기도 하고. 기어코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을 만든 그녀. 그것을 모두 상실하고도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젠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너는 저리로 나가야 해. 톡 대기만 해도 열리는 거 봤지? 오지 않을 주인을 기다리다 서서히 굶어 죽는 건 딱 질색이다. 돌봐줄 사람을 찾든 쓰레기통을 뒤지든, 너는 나가서 어떻게든 살아야 해. (p. 136-137)


다녀오겠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 이쪽으로 등을 돌려댄 채로. (p. 140)


보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어떤 심장의 소용돌이들. 류가 떠난 뒤로는 의미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것들. 그리고 그것은 손안에서 차게 식은 무용의 윤기 없는 털의 감촉으로까지 이어진다. (p. 313)



그녀가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마음이 약해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항상 본인이 작업에서 돌아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반려견 무용이 나갈 수 있도록 "노상 창문을 열어"(136면) 두던, 방역 대상의 아들에게 "정성 들여 제대로 된 약을 챙겨"(132면) 주던, 그 모순적이고 불완전한 행위가 그녀의 천성을 알게 했으니까.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기어코 "다녀, 온다."(168면)는 말을 하는 그녀. 어쩌면 돌아올 곳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녀가 약을 챙겨 주었던, 그러니까 그녀의 손에 아버지를 잃었던, 그 아이는 비극적이게도 또 다른 킬러(투우)로 성장하게 된다. 그가 참 가엾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토록 조각을 증오하면서도 애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마음을 떠올리면서. 한동안은 조각과 투우가 마지막 전투를 벌이던 그곳에 머물러 있을 것 같다. 평생 남을 헤치면서 살아온 이들의 결말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마땅한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유년 시절을 아주 천천히 보듬어주고 싶다. 아니, 어쩌면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342면) 모든 순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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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쇄

─ 구병모, 위즈덤하우스


생각을 매 순간하되 생각에 빠지면 죽어. (p. 83)



『파쇄』는 『파과』의 외전으로 쓰인 작품인데, 짧은 단편 소설이다. '조각'이 본격적인 업자가 되기 위해 '류'와 함께 했던 합숙 훈련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그에게서 "생각은 매 순간해야 하지만, 생각에 빠지면 죽"(10면)는 다는 것을,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동요하지 않"(53면)아야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조각이 류를 향한 마음을 억눌러야만 했던 순간들이 애잔하게 묘사된다. 『파쇄』를 반드시 먼저 읽은 다음, 바로 이어서 읽을 것을 추천.



쓸모 있는 업자가 되는 데에 필요한 무수한 것들이 있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를테면 무방비 상태로 맨살을 드러내는─이 닥치더라도 동요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걸, 그리하여 그녀는 잔돌이 던져져도 동심원을 그릴 줄 모르는 수면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등에 닿는 얼음물 같은 멘소래담과 함께 알게 된다. (p.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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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의 마치

─ 정한아, 문학동네


"이곳엔 수많은 당신이 있지만, 전부 당신이라는 존재의 허상일 뿐이에요. 거울에 비친 상과도 같죠. 그러니까 도플갱어 어쩌고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유일하고 고유해요." (p. 86)



3월에 태어나 '마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마치는 성공한 60세 노년 배우이다. 그녀는 남부러울 재력과 명성을 가졌지만, 그 이면의 삶은 기구하기만 했다. 어머니와 계부에게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그녀가 의지했던 언니는 어린 나이에 죽었다. 게다가 새롭게 생긴 가족, 남편과도 사이가 좋지 못함은 물론 그와도 오래전 사별하였다. 아들은 행방불명 상태이고, 딸과는 서먹한 관계. 이토록 지난한 삶에 또 다른 큰 사건이 생기는데, 바로 '알츠하이머'에 걸린 것. 그녀는 수소문 끝에 VR 치료를 알게 되고, 그녀의 기억으로 구현된 가상현실을 넘나들면서 치료를 받는다.



"형벌이나 다름없겠지."

이마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기 갇혀서 영원히 자기 인생을 보는 것 말이야."

"아까처럼 젊은 시절을 계속 볼 수 있는 건 꽤 괜찮은 것 같은데요."

"글쎄. 난 저 시절 난 매일 죽고 싶었어." (p. 111)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구성된 가상공간 속에서 아파트 관리인 '노아'를 만나 그와 함께 아파트를 살펴보게 된다. 그 아파트는 이마치 인생 그 자체였고, 그 안에서 그녀는 다른 나이의 이마치들을 만나게 된다. 커리어를 포기하고 임신과 출산을 해야만 하는 이마치, 아들을 잃은 이마치, 학대 당하던 어린 이마치 등을 만나면서 그녀는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또 가려져 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과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이마치. 그런 고통스러운 기억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VR 치료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그것들을 잊고 싶어 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뭔가를 잃어버렸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내게 물었어.

"당신은 그런 거 없어?"

왜 없어. 누구에게나 그런 게 있지.

정말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고서야 알게 되는 것 같아.

그래서 인생이 이렇게 슬픈 거야. 축축한 거야. (p. 113)



그래도 그녀의 곁에 늘 K(고기석)가 있었다. 그녀의 매니저였던 K는 마치를 위해 택시 기사인 척 위장하면서 늘 그녀의 곁에 머문다. 그녀가 자신을 잊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마치가 파산 직전의 자신을 아무 담보도 없이 도와줬던 그때부터, 항상 같은 마음으로. 결국 그녀는 VR 치료를 중단하고, 기억을 잃어가면서 "유일하고 고유한"(86면) 이마치로서 남은 생을 보내게 된다. 그녀가 "인생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들. 별 대단치 않은 실패들, 성공들, 전부 다"(228면)를 놓아버리고서. 평생 타인의 삶을 완벽하게 연기하면서 정작 자신의 삶은 누릴 줄 몰랐던 그녀. 노아의 정체를 알게 되고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읽고 나면, 자신의 삶과 화해하는 이마치를 응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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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흠집이 만연한 불완전한 존재라서, 아무리 억눌러도 흘러나오는 마음이 있어서, 서로를 사랑하고 또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건 당신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약함과 불완전함을 쓰다듬는 것. 삶에 충실하면 어딘가 미흡한 우리의 모든 순간이 그다지 대단치 않으면서도 대단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지나간, 그리고 떠나간 것은 그대로 두고, 지금만을 온전히 살자고 다짐해 본다. 그것이 돌아오지 않을 모든 것들을 단단하게 사랑하는 일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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