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 기록

그곳에는 내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돼

『내 꿈에 가끔만 놀러와』, 『빛과 실』, 『단 한 번의 삶』

by 박은영



SE-7fed1ccd-3d70-4a7c-bfe3-f4adc2bcd7f2.jpg?type=w1


최근에 애정하는 작가님들이 산문집을 출간했다는 소식에 구입해 읽었다. 사실 에세이를 자주 읽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라면 챙겨보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시인의 에세이를 참 좋아하는데, 숨어 있는 시를 발견하는 재미랄까! 지난 한 주 동안 읽은 책들을 모아 모아 기록해 본다. 고선경 시인, 김영하 작가, 한강 작가. 이미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분들이니, 한 권쯤 선택해서 읽어보아도 좋겠다.






SE-7b5e5fc3-0cce-4a63-ba32-f27e015ea80a.jpg?type=w1


| 내 꿈에 가끔만 놀러와

─ 고선경, 문학동네


그래, 멀리멀리 가라. 봄은 뭐든지 시작하기에 좋은 계절이니까. 지금도 가는 중인 모든 친구가, 한때 친구였던 모두가 각자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좋겠다. 그곳에는 내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그런데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있을 것이다. (p. 20)


강연을 할 때마다 마지막에는 결국 이런 말을 꺼내게 된다. 문학은 결코 여러분의 인생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제넘은 말인지 모르지만, 아무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저히 포기가 안 됐으면 좋겠다. (p. 34-35)



고선경 시인의 첫 번째 산문집. 일단 표지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샤워젤과 소다수』,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둘 다 애정하는 시집인데, 산문 출간 소식도 너무나 반가웠다. 내가 <럭키슈퍼> 아끼는 거 이제 만인이 알 듯한데, 이 작품은 사실 신춘문예 당선했을 때부터 (시인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오랫동안 좋아했던 시이다. 녹록지 않은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어딘가 유쾌한 표현들이 가애했다. 이 산문집 역시 등단 직전의 막막함, 고뇌, 삶의 외로움이나 우울 같은 감정들이 솔직하면서도 사랑스럽게 담겨 있어서 좋았다. 참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어쨌거나 사랑이 참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SE-29d528c3-63ea-405d-9668-c4fd07bbd016.jpg?type=w1



어느새 나는 스무 살보다 서른 살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나이를 먹는 건 별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금껏 한 해 한 해 꼬박꼬박 먹어왔으니까. 하지만 서른 살이 된다는 건 조금 별스럽게 느껴진다. 아니, 별스럽기보다는 약간 머쓱하달까. 어릴 적 꿈꾸던 어른의 모습에 조금도 가닿지 못한 내가 이렇게 어른의 형성을 하고 있다는 게. 스무 살 부럽다, 그런데 진짜 안 부럽다, 이런 생각이나 한다는 게. (p. 38)


그리고 문득, 여름 정말 알쏭달쏭하다는 생각. 느닷없이 탈이 나곤 하니까. 그런 와중에도 바깥은 심하게 초록이니까. 모든 게 맹렬한 계절인데, 나는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이 계절에 흔한 슬픔이다. (p. 110)



고선경 시인은 97년생. 나와 매우 비슷한 나이이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표현한 불안감이나 우울은 나의 것과 매우 흡사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내가 아직도 미성숙하며, 어릴 적 기대하던 어른이 되지 못했다니. "나는 누구에게도 좋은 선생이 되지는 못할 것"(104면), "그럼 나는 뭐가 될 수 있지."(104면) 같은 감정들. 나 역시 불안하면 -여전히- 글을 쓴다. 슬픔이 없었다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글을 사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조금 슬프지만 문장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기로 한다. 중요한 것은 "인생을 포기하지 않"(53면)는, 또 무언가를 "스스로 놓지 않고 지속하는"(132면) 일이므로.



그걸 허비라고 생각하지 마. 네 꿈이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 네 주관, 네 의지를 관철한 거 아니야? 그런데 왜 허비야? 네가 너를 의심하면 네 선택을 누가 존중하지? 네가 허비라고 하면 정말 허비가 돼. 네 시간은 네 거잖아. (p. 137)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내가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나는 대부분의 집단(SNS 같은 것들)에서 '본명'을 사용하는데, 나는 누구에게 보여줘도 괜찮은, 부끄럽지 않은, 온전한 나로 있고 싶기 때문이다. 뒤로 숨지 않아. 나는 나야. 그러니까, 내 꿈을 보여줄게. 우리 반짝반짝 찬란한 꿈을 오래도록 꾸자. 가끔은 탄산수처럼 팡팡 터져도 좋을 것이다. 어떤 꿈도 함부로 "비웃거나 동정하거나 응원하지 않"(193면)는다면.









SE-849f517c-5d52-45e1-b399-8845bf4d0863.jpg?type=w1


| 단 한 번의 삶

─ 김영하, 복복서가


그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다. 미래는 불확실의 영역이다(오직 죽음만이 확실한 미래다). 이런 불확실성은 당연히 불안을 야기한다. 불안이 극에 달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고 너무 없다면 위험할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한 불안을 감수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p. 140)



『단 한 번의 삶』은 김영하 작가가 『여행의 이유』 이후 6년 만에 출간한 산문으로, 온라인 서점 상위권을 꾸준하게 차지하고 있다. 초기작을 애정하는 독자로서 작가님의 『작별인사』를 읽고 그 다정함에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물론 부정적인 놀람은 아니고), 이번 산문집도 어딘가 모르게 여유롭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특유의 관조적이고 냉소적인 감각은 남아 있었지만. 작가님도 본인이 변한 이유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다", "잘 모르기 때문"(75면)이라고 답하시더라. 사람은 다 변하는 거 아닐까. 나도 예전에 비하면 여러모로 많이 변한 것 같다. 아, 그리고 여담이지만 언젠가 작가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작가님 목소리와 말투가 조곤조곤하고 부드러워서 모든 표현이 순화되어 들렸던 기억이. (ㅎㅎ)



SE-947e1480-f82d-40c8-8b8b-4823bd00ce65.jpg?type=w1


그 언어는 모호하다. 이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저것을 말하고, 저것을 말하면서 이것을 말한다. 때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언어이며, 사람에 따라 무한히 다르게 해석된다. 회계가 그랬다가는 큰일이 날 것이다. 그런데 문학은 그래도 된다. 그래서 좋았다. (p. 48)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을 굳게 믿기만 한다면, 인간은 그 어떤 잔혹한 고통이라도 견딜 수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라는 것을 그때 처음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p. 113)



삶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진다. 이것은 놀라운 축복 같지만, 한없는 불행 같기도 하다. 가끔 이런 생각이 극심해지면, 누군가 태초의 나를 아주 깊은 구덩이에 던져 넣은 것 같기도 했다. 삶은 고통이라는 불교의 말처럼. 물론 어떤 세계에서는 또 다른 내가 살아가고 있거나 죽은 뒤에 부활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고, 나는 '단 한 번의 삶'만 생생히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과거의 선택이 너무나 후회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끊임없이 '만약에'를 하게 된다. 이랬다면, 저랬다면 어땠을까… 하면서. 하지만 이런 "살아보지 않은 인생"은 "나는 거기에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없었다. 그게 전부"(185면)인 것이다. 때로는 이런 건조한 사실이 위안이 된다.



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도 않는다. (p. 61)


액정화면 밖 진짜 세상은 다르다고. 거기에는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아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싸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p. 152)



단 한 번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위안>의 문장처럼 인생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과 있는 것. 두 가지로 나뉜다. 이미 벌어진 일, 그리고 불가피하게 벌어질 일들. 내가 실망시킨 사람들, 나를 실망시킬 사람들. 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면 선택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니까 다짐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적대"(29면)보다는 "무뚝뚝한 환대"(29면)를 택하자고.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아"(152면) 보자고. 나는 나를 제일 잘 알기도 하지만, 또 모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적당한 불안"(140면)을 끌어안고, 부단히 삶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역시 기대치가 높은 인기 작가이기 때문에 아쉽다는 평도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여행의 이유』보다 좋았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다. 문장도 더 좋고. 그냥 좋으면 좋은 거지 뭐. 참, 에세이는 언급된 작품을 연계해서 읽는 쏠쏠한 재미가 있는데(바로 이어서 보면 확장판 느낌이다!), 이번 연휴에는 책에 언급된 영화 몇 편을 다시, 또는 새롭게 보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책의 왼쪽 정렬은 아직 적응되지 않더라. 제 양끝맞춤 돌려주시옵소서. 기왕이면 들여 쓰기도요. * 작가님 인스타에 왼끝맞춤(오른끝흘림)에 관한 사유가 자세히 나옵니다. (ㅠㅠ)









SE-1c63dfc3-8aed-431f-bb7a-21d4a03a342e.jpg?type=w1


| 빛과 실

─ 한강, 문학과지성사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p. 19)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처음으로 출간된 한강 작가의 신작.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이 포함되어 있다니 소장 가치가 있을 것 같아서 구입하였다. 산문집에는 작가님의 강연문, 시, 수필, 정원일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미발표된 시가 여러 편 담겨 있어서 더 좋았다. 작가님은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모든 생명을 사유할 수 있을까. 그녀가 글을 쓰기 위해, 어쩌면 살기 위해, 자처했던 모든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면 그건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고통을 직면하면서도 "꼭 죽은 것처럼 보여도 뿌리가 살아 있으면 되살 수 있"(115면)음을 발견하는 사람이라니.



SE-5f3bc7a5-6d5d-4281-b9c3-f6b56779bfb7.jpg?type=w1


어렸던 나는 그 사진들의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 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p. 16)


어쨌든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이다. 지금까지 쓴 책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어느 사이 모퉁이를 돌아 더 이상 과거의 책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p. 26)



나는 지금도 뉴스를 챙겨 본다. 가자 지구의 생지옥을 두 눈을 부릅뜨고 직면한다. 그리고 인간이, 과연 인간으로 태어나 할 수 있는 행동인지에 관해 생각한다. 어떤 이념이나 가치가 어떤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관해. 살아있는 한 포기할 수는 없다. 과거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햇빛이 없는 곳에는 각도가 조절되는 큰 거울을 두 자. "남쪽으로 비치는 햇빛"(92면)을 줄 수 있으니까. 빛은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74면), "살아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희망을 상상하는 일"(76면). 구원은 그곳에 있다.


분량이 아쉽다는 평이 많았는데 책을 받아보면 무슨 느낌인지는 알 수 있다. (작가님보다는 출판사에 느끼는 아쉬움 아닐까 싶지만) 분량이 짧고 여백이 많다. 그래도 나는 그럼에도 좋지 생각한다. 이런 문장을 읽는다는 건. 솔직히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2024) 진심 좋아요. 너무 좋아요. 문장을 끌어안고 살아가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이 산문집을 제대로 읽고 싶다면 (특히 앞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님의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흰』, 『희랍어 시간』, 『바람이 분다, 가라』 정도는 먼저 완독한 뒤 읽기를 추천!







SE-d93e1ed4-27b6-4066-9a18-e10c089eea77.jpg?type=w1
SE-3c19a80e-2272-4827-bb83-61b141fffb31.jpg?type=w1


불확실한 미래에 관해 말하는 작품들. 그것을 통해 나의 불안이 얼마나 보편적인 정서인가를 알게 된다. 이토록 다른 우리가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 나는 조금 더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 한 번의 삶』에 언급되었듯, <시네마 천국>의 '토토'에게는 "돌아오지 마라"라고 말해주는 '알프레도'가 있다. 영화 <굿 윌 헌팅>의 '윌'에게는 "언젠가 네가 여기 없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친구 '처키'가 있고. 누군가의 성공을, 그리고 행복을 비는 일이 꼭 곁에 있는 것만을 아님을, 우리가 멀어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당신이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선함을 등에 업고 빛을 향해 나아갔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미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으니까. 그러니 그곳에 나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keyword
박은영 도서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직장인 프로필
구독자 613
매거진의 이전글언젠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