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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 기록

여긴 그래도 되는 곳이야

『빛을 걷으면 빛』, 『혼모노』

by 박은영



베스트셀러 단연 1위를 달리고 있는 성해나 작가님의 『혼모노』 사실 사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었는데, 도서관 대출이 너무나 어려워서 결국 구입. 사실 <혼모노>는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스무드>는 『소설 보다 : 봄 2025』에서 이미 읽었지만(두 편이나 읽었네**), 나머지 단편도 읽고 싶어서 구입했다. 그리고 『빛을 걷으면 빛』도 함께 기록! 사심을 가득 담아 후자가 더 좋기 때문.



** <혼모노>는 사실 『소설 보다 : 겨울 2023』에도 수록되어 있다. 여기 김기태 작가님의 <보편 교양>도 있고. 단편 소설은 약간 이런 식이다. 구입할 때는 수록작을 잘 살펴보시기를!







| 빛을 걷으면 빛

─ 성해나, 문학동네


이목 씨는 말했다. 어둠을 걷으면 또 다른 어둠이 있을 거라 여기며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어둠을 걷으면 그 안에는 빛이 분명 있다고.


나는 이제 살아내지 않고, 살아가고 싶어요. 견디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p. 92)



『빛을 걷으면 빛은』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성해나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보통 소설집을 사면 뭔가 아쉽기 마련인데 이건 그런 느낌이 없다. 알찬 느낌. 그리고 보통 표제작이 도서명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전 작품을 아우르는 단독 표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작은 특징. (「화양극장」의 문장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만약 '화양극장'이 도서명이 되었다면 이 따사로운 느낌과 매력은 없었을 듯) 읽는 내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로, 어떤 것을 강요하거나 주입하는 느낌이 없어서 좋았다.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알아가 보려는 마음이랄까. 모든 작품이 세대나 소속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갈등, 오해, 편견을, 그러니 조금 예민할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특정 집단을 비난하거나 옹호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히 따스한 빛으로 포착하여 그려낸다.



그리고 나는 꿈, 희망, 그런 말 싫어해요. 나한테 해준 게 없거든요 그게.

어둠 속에서 할머니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꼭 겁쟁이 사자 같다.

(…)

난 너 그거 계속 했음 좋겠다. 타투인가 그거…… 도망치지 말고.

내 허벅지에 손을 얹은 채, 할머니는 말을 이었다.

그거 할 때 너 참 좋아 보이더라. (p. 321)



특히 가정에서의 아픔이 있는 청년 하라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셰어링 하우스' 이야기, <오즈>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들이 자해의 흔적을, 피해의 흔적을 새로운 타투로 덮어보려는 과정이 너무나 슬프면서도 다사로웠다. 할머니의 취미는 압화인데, 자꾸 떠오르는 기억들을 잊기 위해서 압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미움과 분노를 꾹꾹 누르면서. 하지만 그녀는 절대 줄기에 붙어 있는 꽃은 따지 않는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만"(316면) 줍는 할머니. 그녀는 그것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 하라는 할머니를 보내고 나니 '가족'이라는 명목 앞에서 그녀와 연결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서도 씩씩하게 나아갈 것이다. 고작 두 계절을 함께 살았지만, 그들의 몸에는 피보다 더 깊고 진한 타투가 새겨져 있으니까.




제대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삶. 그리고 그런 할머니와 함께 사는 삶. 그것에 대해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나로서는 상상조차 버거운 삶이었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데, 그런 사정을 남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이해시키기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p. 26)


저 시기의 나는 참 위태로웠어요. 다시 저 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결코 내 마음을 속이지 않을 거예요. 속 편히 웃고 울고 싸우고. 견디지 않을 거예요. (p.69)



지금 우리가 '잘' 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보다 '살아낸다'는 말이 훨씬 잘 어울리는 삶. 지금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여긴 그래도 되는 곳*"(258면)이다. 어둠이 찾아오긴 하지만, 끝끝내 걷어낼 수 있는 곳.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곳. 이목 씨와 경의 <화양극장>, <당춘>에서 영식 삼촌이 포기하지 않는 농촌 마을, <오즈>에서 하라와 할머니가 살았던 집, <김일성이 죽던 해>에서 순이, 문덕, 상희가 공유하던 나우누리 같은. 중요한 것은 '어디'보다는 '누구'이며, 마음이고 다정이라는 사실을 참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나는 언젠가 불가해했던 그 사람이 되기도 하고,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불가해한 존재일 것이며, 어떤 것은 영원히 불가해로 남을 것이다. 도호에게 "난 네가 될 수 없어"(52면)라고 하면서도 엄마처럼 비겁해질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유수처럼. 불가해의 세상 속에서 나는 연수 씨처럼 살기로 한다. "주인공 뒤에서 구르고 끌려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91면)을 놓치지 않으면서. 또 나는 길례 할머니처럼 살기로 한다. "죽은 것처럼 봬도 이렇게 다 살아 있"(266면)는 것들을 기어코 찾아내 갸륵해하면서. 중요한 건 외면하지 않고 인정하는 일이다. 엔딩 크레디트가 아직 올라가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영화는 "영원히 끝나지 않"(93면)는다.








| 혼모노

─ 성해나, 문학동네


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큭큭, 큭큭큭큭. (p. 120)



『빛을 걷으면 빛』이 다사로운 눈으로 세상을 읽었다면, 『혼모노』는 보다 서늘하고 예리한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본다. 작품의 캐릭터들이 상당히 강렬하고 독보적이며, 몰입이 잘 된다는 것이 특징. 서사도 되게 신선하고. 재밌다는 평이 많던데, 읽는 내내 재밌다기보다는 '불편'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잘 읽히긴 하지만, 여기서 멀어지고 싶은 그런 느낌. 그렇다고 이 책이 부정적이라는 평은 아니고, 때로는 직면하고 견디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런 시간을 안겨주는 작품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의 구보승이나 <우호적 감정>의 진처럼 어딘가 꺼림칙한 인물들이 나오는데, 모호한 선악 속에서 찝찝한 기분을 계속 느껴야 한다. 그래서 여재화나 알렉스처럼 어딘가 불편함을 느끼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물들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달까.



그건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

떨쳐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말처럼, 이미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으니까. (p. 65)


삽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p. 152)



작품 설명처럼 이 책은 '진짜'란 무엇인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스무드>에서 재미한인 3세 '듀이'가 길을 잃고 사람들에게 휩쓸려 갔다가 '이승만 광장'에서 느꼈던 유대감과 소속감 같은 온정, <잉태기>에서 서진 엄마인 '나'와 시부가 서진에게 쏟아부었던 집착에 가까운 애정,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에서 '나'가 과오가 있는 영화감독 김곤을 좋아하는 마음, <혼모노>에서 장수 할멈이 떠났음에도 필사적으로 작두를 타던 무당(문수),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 고문실을 철저하게 "인간을 위해"(193면) 설계했다던 구보승의 말. 그것을 모두 진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느꼈는데, 온 마음을 다했는데 그것을 가짜라고 할 수 있을까? 선명한 질문만이 남는다. 완벽한 선이나 악, 정답과 오답이 불분명한 곳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아무래도 마지막 <메탈>. (취향은 어쩔 수가 없다) 이 작품은 한때 메탈 음악을 꿈꿨던 밴드부 친구들이 현실에 부딪히면서 꿈과, 또 서로가 점점 멀어지는 얘기이다. 서울로 대학을 간 조현, 아버지 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시우, 마지막까지 음악을 놓지 않았던 우림. 『두고 온 여름』 읽을 때 느꼈던 그 따뜻한 슬픔도 느껴지고 해서 좋았다. 왜 어렸을 때 꿈꿨던 것들은 다 멀어져 버리는 걸까. 하지만 우림이 멀어졌던 조현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던 것처럼(혼자 조현이 전화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 머릿속에서 그 둘은 이미 화해도 했다) 어떤 것은 영원하기도 하다고.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라는 걸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거죠? (p. 192)


의지할 것이라곤 희미한 전조등과 친구들의 웃음뿐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달리면 우림은 더 나아질 것도 망할 것도 없는 현실에 가능성이 부여되는 것만 같았다. 녹슬지도 썩지도 않는 꿈을 영원히 꿀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p. 305)



<혼모노>를 소설집의 대표작으로 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혼모노(진짜)와 니세모노(가짜) 사이, 우리는 그쯤에서 살아간다. 진짜란 무엇인가? 당신은 진짜인가? <스무드>에서 '제프'의 작품이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이유는 "작품에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없"(71면)기 때문이다. 어떤 사전 지식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비판하고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진짜'는 "구 안쪽"(71면)을 들여다보는 일 아닐까. 그것이 결국 '진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찐"(12면)이라고 여겼던 것이 얼마나 편협된 시각인지. 이 작품은 이야기하고 있다. "존나 흉내만 내는 놈"(120면), 아마 그것은 '나'일 수도 있고 내가 '아닐' 수도 있다.






『소설 보다 : 봄 2025』, <남은 여름>


완연한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부디 이 뜨겁고 슬픈 계절을 무사히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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