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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 기록

나는 이렇게 불행을 참아내고 있다

조승리,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 최지현,『사나운 독립』

by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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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은 아니고, 사실 읽은 지 조금 된 에세이 두 편. 에세이에는 어쩐지 손이 잘 가지 않는다. 가끔은 '저자가 누군지 알고 책을 읽어?', '별로 안 궁금한데?'와 같은 삐뚤어진 마음이기도 하고, 또 지나치게 불행한 서사는 - 저자에 의해 어루만져졌다고 해도 - 결국 누군가가 겪은 일이니까, 그 선명한 고통에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읽어야만 했던 에세이 두 편. 마냥 재밌다고만 할 수 없는 책들을 당신 앞에 조심스레 내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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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 조승리, 달


'극복'이라는 말처럼 오만한 단어가 있을까? 장애를 극복하고, 가난을 극복하고, 불합리한 사회를 극복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영원히 내 장애를 극복하지 못할 거라고. 나는 단지 자주 내 장애를 잊고 산다. 잊어야지만 살 수가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체념한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다. (p. 38)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조승리가 선보이는 첫 번째 단행본. 열다섯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기 시작하여 장애인이자 마사지사로 일하는 그녀의 삶은 당연하게도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놀랍게도,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의 삶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담담하게 글을 쓰는 그녀의 정신력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는 시력을 잃기 시작했을 때부터 미친 듯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닥치는 대로. 왜냐하면 그녀는 "시간이 없었"(16면)으니까.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점점 보이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게. 『희랍어 시간』에는 "내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꿈에서 뿐"(159면)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꿈에서 깨어나면 감기는 세계. 꿈에서만 선명히 볼 수 있는 세계. 그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과연 좌절하지 않고, 아니 좌절하면서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녀는 그것을 해냈다. 씩씩하게 삶을 살아갔다. 그녀는 여행도 가고, 성실히 출근도 했다. 자신을 가로막는 편견에 좌절하기도, 분노하기도 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그게 나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비장애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상이었다. 그 사소함이 우리에게는 특별함이었다.

(…)

진정한 배려란 뭘까. (p. 48)


진정한 복수는 모욕을 주는 것도 용서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상대를 동정하는 것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p.77)



활동지원사인 수미 씨와의 에피소드도 참 좋아하는데, 수미 씨는 그녀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149면)이다. 수미 씨는 어린아이처럼 선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구김 없는 사람. 부족함이 없이 살아온 사람. 올곧은 사람. 때로는 이런 악의 없는 순수한 선의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했다. 수미 씨는 장애인의 삶을, 장애인을 가진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그녀의 "상식"(155면)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비판하곤 했다. 그런 수미 씨에 가 '나'는 장애인 자식이 있어봤냐며, 그런 적도 없으면서 헐뜯을 자격이 있냐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울먹이는 수미 씨의 말. 내가 오만했어요. "난 그래본 적 없죠. 함부로 남을 재단해서는 안 됐는데"(155면) 그들의 언쟁은 꼭 수미 씨의 눈물로 끝난다고 했다. 이처럼 나의 신념이나 정의는 타인에게 상처가 되기도 한다. 타인의 삶이나 이면은 결코 온전히 알거나 이해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내뱉거나 행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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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끌어안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나는 마모된 몽돌이다. 까맣고 동그란 몽돌. 바다는 나를 끌어당겼다가 멀찍이 밀어놓기를 반복한다. 누구에게나 불행을 견디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불행을 참아내고 있다. *(p. 158)


(…) 평온한 일상에 안도한다. 순간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남의 불행을 자신과 비교하며 안도를 찾는 이들을 나는 얼마나 경멸했는가? (p. 187)



나는 아직 동정과 연민, 그리고 배려의 차이를 모른다. 아마 "진정한 배려"(48면) 같은 건 평생 모를 수도 있다. 다만 나의 다짐은 남의 불행을 자신과 비교하며 안도를 찾지 않겠다는 것.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불행을 참아내고 있으며, 꿈을 꾸고 있다. 나는 그 삶을, 꿈을 멀리서 응원하기로 한다. 희곡을 쓸 때보다 샌드위치를 만드는 게 더 즐겁다는 사실을 끝내 인정한 저자의 한 손님처럼 샌드위치도 누군가의 꿈이 될 수 있다고. 모두가 꿈을 꿀 수 있고, 모든 이의 꿈은 귀하고 값지다. 이건 승리 씨가 나에게 알려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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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나운 독립

─ 서평강 외, 무제


내 불행의 자리에 꼭 들어맞는 행복이란 건 애초에 없었다.

상실은 어떤 것으로도

완벽하게 대체되지 못한다. (p. 277)



『사나운 독립』은 독립 출판 도서였는데, 올해 무제 출판사에서 정식 출간되었다. 이 책은 1980년대생인 세 여성의 '독립' 이야기로, 엄마가 된 딸들의 내면을 진솔하게 풀어가고 있다. 어딘가 정돈되지 않은 느낌의 가감 없는 글이 에세이 같기도, 시 같기도 했다. (참고로 왼끝맞춤) 외할머니-엄마-나로 이어지는 장녀의 삶을 기록한 최지현 작가의 <남자 없는 여자들>, 투병 중이던 엄마와 겪었던 아픔과 사랑, 그리고 작별을 그려낸 서평강 작가의 <나선형의 물>, 사랑의 증거로 '아이'를 선택한 문유림 작가의 <열 평의 마그마>까지. '엄마', '딸'과 같은 수많은 수식어를 온전히 품거나 걷어내며 진정한 '나'를 향해 걸어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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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설명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그렇게 된 지는 오래되었다.

해명이라고 해야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것만 같다.

순간순간의 행동에 대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선택에 대해 스스로가 납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색하지 않다가 발작적으로 울거나 화내기

선생님과 작별 인사를 하기 싫어서 마지막 수업에 가지 않기

좋아하는 마음이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아서 상대와 적극적으로 멀어지기

인생의 커다란 분기점이 될 수도 있는 선택을 저녁 메뉴 고르듯 해버리기


모두 내게 속한 불안의 얼굴들이었다. (p. 78-79)



<남자 없는 여자들>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 나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람. 헤어질 것이 두려워 시작하지 않는 사람. 매사 신중하다가도 정작 중요한 건 급하게 결정하고 후회하는 사람. 나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사랑할 수 없어서 발작적으로 화내고 틀어박히는 사람. 결정적으로 누구와도 이 마음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 그건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가는 문과 함께 들어오는 문도 닫아 버렸다는 사실을 모른 채 길을 잃"(97면)은 사람. 그녀는 글을 쓰면서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세계"(124면)를 찾았다. 나도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그녀처럼 글을 쓰고 꿈꾸는 순간이 더없이 행복하다. 이곳에서 나는 평안을 되찾는다. 그녀와 내가,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조금 더 행복하기를 더없이 바라본다.



글의 세계에서는 조금 더 운신의 폭이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해도 안전하다. 죽음으로써 독립을 시작하고 미래의 사랑까지 내팽개쳐 버릴 수 있는 곳. 그 어떤 것도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만드는 것도, 도망칠 여지없이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것도.


이제는 찾아오는 꿈들에 악몽이라 이름 붙이지 않는다. (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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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모르는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해 줄 사람이 없다. (p. 266)



<나선형의 물>은 꼭 혼자 읽기. 키워드가 '엄마와 딸', '간병', '상실'이니까. 오랜 시간 미워하면서도 사랑한 존재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더없는 미움과 사랑으로 점철된 감정이 온전히 다가온다. 나이가 들면서 짙어지는 상실의 그림자는 어쩔 수가 없다. 이미 겪었고, 또 언젠가 겪어야 할 슬픔은 우리를 '독립'으로 몰아세운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발판 삼아 서 있을 것이다. "상실은 어떤 것으로도 완벽하게 대체되지 못"(277면)하니까. 아주 깊은 곳에 잠겨 있을 뿐. 문유림 작가의 말처럼, "오래된 이별"을 할 뿐이다. 아주 "끈질기게 찾아오는."(36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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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과 고통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다채로운 얼굴로 찾아온다. 불행은 형태가 저마다 달라서 각자의 불행은 온전히 자신만 누릴 수 있는 전유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서로를 읽으려 노력해야 하는가? 외로움과 상실의 보편성, 그리고 결코 대체되지 못할 "불행의 자리"(277면)에서 "함께 아파하는 것"(100면). 그곳에 해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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