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 『너의 유토피아』, 『아이들의 집』
정보라 작가님 북토크를 신청하게 되어 급하게 읽기 시작한 작가님 작품들. 사실 예전에 『저주 토끼』를 읽다가 힘들어서 멈췄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났다. 굉장히 자극적이라 영상화가 된다면 절대 못 볼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래도 『너의 유토피아』와 『아이들의 집』은 꽤 읽을만했으니 두 작품을 기록으로 남겨본다. 역시 투쟁적인 성향의 작가님이라 그런지 작품도 굉장히 생존적이고 강한 편이다. 본인의 작품에는 교훈이 없다는 작가님 말씀과는 다르게 작품 속에서 불의하고 폭력적인 사회를 향한 비판과 인간성 회복에 관한 의지가 돋보였다.
─ 정보라, 래빗홀
그러나 씨앗은 살아남을 것이다. 수많은 씨앗 중 하나 정도는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아서 어딘가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하나만 있으면 새로 시작할 수 있다.* (p. 353)
『너의 유토피아』는 정보라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으로 재미있으면서도 어딘가 기괴하고 서늘한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스마트카', '인공지능 엘리베이터'처럼 첨단 기술이 보편적이거나 '식인병'이 창궐하기도 하는 상상 속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지만,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점과 비극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큰 특징. 노동자의 열악한(심지어 죽기도 하는) 현실이나 성소수자가 직면하는 차별처럼 한국인이라면 읽어낼 수 있을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그녀를 만나다>에는 직접적인 명칭(변희수 하사)이 등장하기도 한다. 작품은 부당한 이유로 고통이나 차별을 받는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애도하며, 그와 동시에 질문을 던진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마땅히 견지해야 할 태도에 관하여.
표제작 <너의 유토피아>가 가장 좋았는데, 이는 인간이 버린 세상에서 살아남은 '스마트카'가 보여주는 절망과 희망의 이야기다. 스마트카는 의료용 휴머노이드인 314를 태우고 다니는데, 314는 마치 사람처럼 보인다. '비생물 자성체'인 스마트카는 자신의 소유주를 떠나보내고, 하는 말이라고는 "너의 유토피아는…" 정도밖에 없는 314에게 어떤 위안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는 본인도 어렵게 충전하며 이동하는 처지임에도 314를 지키려는 노력을 지속한다. 그리고 스마트카는 절망 속에서도 절대 희망을 잃지 않는다. 한 자릿수에 불과한 전력에도 그의 유토피아 척도는 한 번도 0이 된 적이 없다. "나아질 것"(52면)이라고, "나는 이동하는 존재"(79면)라고 말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저 "그와 함께 어둠 속에 웅크리고 해가 뜨기를 기다"(57면)릴 뿐. 인간보다 인간다운 기계로부터 슬픈 인류애를 느낀다면, "너의 유토피아는?"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지면을 넘어 귓가에서 들릴 것이다.
정지한 상태로 파괴당하거나, 이동하면서 파괴당하거나, 이동한 뒤에 파괴당하거나, 확률은 모두 같았다.
나는 이동하는 존재다. (p. 79)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서 위안을 얻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관계가 생계와 연결될 때는 더더욱 안정적으로 느껴지겠지. 그러나 연구소 로비에 잠시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다시 일하러 올라가기 전에 나는 어쩐지 무섭고 슬프다는 생각을 했다. (…)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영생 불사를 하건 안 하건, 자기 생계를 자기 손으로 마련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와 같은 처지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딱히 위안이 되는 건 아니지만. (p. 48)
종종 이미 한국이, 아니 세계가 망했다는 생각이 든다. 되돌릴 수 없을 것도 같다. "이상한 사람들"(233면)이 너무 많다. "절대 잊지 않"(246면)겠다고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 "어떤 것은 잊게"(246면)된다. 아니 대부분의 것은 무뎌지고 잊힌다. 그런 상황에서 '유토피아'를 찾는 일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이 책의 말미에 수록된 작가의 말로 이 해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 천년왕국적 유토피아적 태도는 그리스도교적인 용어라서 좀 어려워 보이지만 내용인즉 당장 유토피아가 이루어져야 하고 안 이뤄지면 혁명! 때려 부순다! 이런 방향이다 (개인적으로 몹시 마음에 든다). 그리고 인본주의적-자유주의적 유토피아적 태도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상 사회가 내 눈앞에 나타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더 좋은 세상이 반드시 올 테니까 꾸준히 그때까지 노력하는 태도라고 한다. 나는 실제로 이런 태도를 견지하며 언제 이루어질지 모를 더 좋은 세상을 어떻게든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분들을 많이 알고 있다. (p. 361, <초판 작가의 말> 中)
이상 사회는 아마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더 좋은 세상"(361면)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이상한 사람들"(233면)이 있다. 본인에게 아무런 이득이 돌아오지 않아도 그저 '옳다는' 이유만으로 고단한 노력을 지속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로. 지금도 어딘가에서 힘겹게 투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기둥에 기대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누려왔는가? 이 작품은 알려준다. "기다린다고 해서 구원이 저절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129면)라고. 암울한 현재와 미래 사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인간성이 그곳에 있다.
─ 정보라, 열림원
아이의 부고는 옳지 못하다고 무정형은 생각했다. 아이의 장례식은 옳지 못하다. 아이의 죽음은 부당하다. 아이는 죽어서는 안 된다.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어야 한다. (p. 225~226)
『아이들의 집』에서는 사회에서 힘 없이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작품의 배경은 인공 자궁 연구가 발달한 근 미래이면서, 국가가 아이들의 돌봄과 양육을 책임지는 국립보육시설, '아이들의 집'이 보편화된 사회이다. 작품은 주거환경관리과 조사관인 '무정형'의 시선으로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생존과 성장의 권리'를 조명한다. 참고로, '색종이', '무정형', '표', '관', '기술과학의 발전을 지지하는 사람들(기과발지)' 등 이름이나 단체명이 보편적이지 않아 헷갈리고, 여러 사건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읽기 힘들 수 있다. (메모하며 읽는 것을 추천) <작가와의 만남>에서 들은 바로는 인물을 특정하거나 시사하지 않도록 여러 도형의 명칭을 사용하다 도형이 부족해서 (ㅎㅎ) 이런 독특한 이름들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무정형이 관리하는 공공임대 주택에서 끔찍한 아동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무정형은 어딘가 이상한 이 사건을 파헤치게 되고, 그들은 가정 학대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납치, 감금한 행위나 친모가 있음에 빼돌리듯 행해진 해외 입양, 아이들을 더 명석하게 만들겠다는 명목하에 자행한 뇌파 치료(고문) 등 끔찍한 사회의 이면을 직면하게 된다. "귀신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죽"(126면)인다는 무정형의 말처럼,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의 어떤 행위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부모가 없어도, 부모가 다쳐도, 부모가 아파도, 부모가 가난해도, 부모가 신뢰할 수 없는 인격을 가졌거나 범죄자라도, 아이들은 그런 부모와 아무 상관없이 자라날 수 있었다. 아이의 삶은 아이의 것이었다. 혈연이 있는 가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기쁜 일이고 행운이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기쁜 일이고 행운이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슬픈 일이지만, 가족의 불운이 아이의 인생 전체를 지배할 필요는 없었다. 돌봄을 받으며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은 모든 아이가 가진 고유의 권리였다. (p. 178~179)
이 작품도 말미에 수록된 작가의 말이 인상 깊었다.
아이의 삶의 경험은 한정적이다. 자신이 경험하는 것이 학대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고 스스로 그 상황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별로 없다. 스스로 탈출한다 해도 한국 사회는 '남의 아이'를 돌봐주지 않는다. 그런 세상에서 아이가 집을 나오면 대체 어디로 가겠는가?
그래서 나는 모든 아이에게 언제나 갈 곳이 있는 사회, 언제나 지낼 집이 있고 언제나 반갑게 맞이해 주고 돌봐주는 존재들이 있는 사회를 상상하고 싶었다. (…)
좀 더 안전하고 평온한 사회를 상상하고 싶었다. 행복은 각자 느끼는 것이므로 그런 사회가 더 행복할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마음 놓고 살 수 있다면, 안심하고 지내다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p. 274~275, <작가의 말> 中)
'남의 아이'를 돌봐 주지 않는 사회. 힘없는 아이들이 방치되고 죽어가는 사회. 심지어는 그들이 악용되는 사회. 정말 이런 사회를 그대로 둘 것인가? 실제로 한국에서는 고아로 호적을 조작하여 해외 입양을 보내는 일명 '아동 수출'이라 불리는 끔찍한 행위가 반복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아동 수출국'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고 하니 진심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집'이 정답이라는 말은 아니다. 어떤 방법이 옳은지는 그 누구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명확한 사실은 모든 아이들은 보호받으면서 성장할 권리가 있으며,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른으로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모든 아이들이 "피해자"(253면)가 아니라 "생존자"(254면)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람에게 지치고 실망한 경험이 반복되면, 변치 않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상정하고 바라게 된다. 그러니 <너의 유토피아>에서 '스마트카'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아이들의 집』에서는 '앨리스'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작품에서 인간과 대비되는 로봇의 가장 뚜렷한 면은 미련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고 정직하다는 점이다. '스마트카'는 괴물에게 쫓기는 위기의 순간에도 본인에게 내재된 원칙을 철저하게 지킨다. '앨리스'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아이의 말을 듣고 본인의 몸이 부서지기 직전까지 그 비밀을 유지한다. 이런 충성스러운 면(내재된 프로그램임에도)은 생명력이 전혀 없는 로봇을 사랑하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가 이런 신뢰를 갈망해 왔고, 여전히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니 언제나 희망은 있다. 누군가, 여전히, 메마른 땅에 씨앗을 뿌리고 있으므로, 우리가 이들과 함께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