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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 기록

진심은 영원하지 않으며

조예은 - 『트로피컬 나이트』, 『입속 지느러미』

by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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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 작가의 책 두 편. 작가님 작품은 『시프트』, 『스노볼 드라이브』, 『칵테일, 러브, 좀비』 정도 읽어봤었는데, (꽤 읽었잖아?) 개인적으로 『칵테일, 러브, 좀비』의 <습지의 사랑>을 꽤나 좋아한다. 얼마 전에 신간 출간하셨던데, 조만간 읽어볼 예정. 일단 오늘은 최근에 읽은 『트로피컬 나이트』와 『입속 지느러미』에 관한 기록. 둘 다 약간 괴이한 호러·스릴러 소설이라 잔인한 묘사를 주의하며 읽어야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사랑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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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로피컬 나이트

─ 조예은, 한겨레 출판


널 등쳐먹어서 미안해. 넌 대부분 한심하고 가끔 사랑스럽지만 잘 살 거야. (p. 208)



표지와 잘 어울리는 괴이하고 다채로운 소설집이다. 독특한 판타지적 설정과 읽기 쉬운 문체로 빨리 책장이 넘어간다는 것이 특징. 대체적으로 잔인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 이야기인데 그 속에 녹녹한 사랑과 슬픔이 흘러나온다. 불운한 상황 속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존재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어쨌든 "버틸만"(209면)한 삶을 지속한다. <고기와 석류>에서 석류를 집 안에 들인 '옥주', <릴리의 손>에서 세계와 차원 너머로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연주'와 '릴리', <가장 작은 신>에서 수안에게 영구 회원 가입 동의서를 건네지 못한 '미주', <나쁜 꿈과 함께>에서 은성의 꿈에서 자신이 "최대한 불쌍하고 귀여웠으면 좋겠"(228면)다고 말하는 '몽마',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에서 끝끝내 서로를 지키고 찾으려 했던 '블루'와 '썸머'까지. 이들의 마음은 동정과 연민, 그리고 사랑으로 혼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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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속 내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 나는 그들이 불행해지길 바라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너무 끔찍해서 죽고 싶기도 했다. (p. 66)


"유리야, 나는 늘 복수하는 상상을 해. 그리고 내 생각에 너랑 나는 닮았어." (p. 133)



기억에 남는 작품은 <새해엔 쿠스쿠스>, <릴리의 손>, <나쁜 꿈과 함께> 정도. <새해엔 쿠스쿠스>는 사립 학교를 그만두고 은둔해 있던 '유리'가 사촌 언니 '연우'가 보낸 메시지에 마음을 열게 되는 이야기다. 유리는 우등생이었던 연우와 지속적으로 비교 당하며, "내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는 강박"(126면)에 시달렸고 심지어는 연우와 외숙모가 "불행해지길 바라"(126면)기도 했다. 그러나 유리가 몰랐을 뿐, 연우도 충분히 불행했다. 연우는 경쟁과 압박 그 모든 부담감에 모로코로 훌쩍 떠나게 되었고, 비로소 유리는 "너랑 나는 닮았"(133면)다는 연우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연우가 보낸 문자에 결국 답장을 남긴 유리. 그들은 언젠가 약속했던 것처럼 모로코에서 쿠스쿠스를 먹으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된 폭력에 상처 입었던 그들이 "엉망진창"(143면)으로 살기를. 끝내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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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하고 멍청한 수안. 이래서야 자신이 아니더라도 분명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했을 것이다. (p. 172)


(…) 통쾌함이나 후련함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어차피 삶은 계속될 테고, 그 사실이 버틸만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p. 209)


어린 시절에 소중한 뭔가를 상실한 경험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흔적을 남긴다. 그게 인형이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강제로 잃은 것이든, 혹은 제 손으로 놓아버린 것이든. (p. 223)



<가장 작은 신은>은 사실 급작스러운 마지막 전개가 아쉬웠던 작품인데, 대부분의 카피라이팅 문장이 해당 작품에서 비롯됐다. 이 작품은 신종 재해인 급성 먼지바람을 계기로 2년째 은둔하고 있던 '수안'을 고등학교 동창 '미주'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미주가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수안을 찾아온 목적은 다단계. 수안은 미주의 의도를 눈치챘음에도 계속 찾아와서 말을 건네는 미주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미주의 생각처럼 수안은 "불쌍하고 멍청하고 착"(172면)했다. 고립된 사람들은 다단계나 보이스피싱과 같은 사기 범죄의 주요 표적이라고 한다. <나쁜 꿈과 함께>의 '은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덕분에 세상은 유지되는 건지도 모른다. 미주가 다단계 계약을 결국 포기한 것처럼. 몽마가 은성의 인형 뽑기를 도와준 것처럼.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거기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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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사람들은 사실 지독하게 외로웠던 건지도 모른다. 사는 게 너무 지쳐서 스스로 고립을 택한 사람들. 그러니 이 소설집에는 슬픈 외로움이 숨어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런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타인의 외로움과 고독을 악용하는 사기 범죄가 증가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믿어야 할까. 하지만 난 당신이 아직 거기 있는 것을 안다. 아직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대부분 한심하고 가끔 사랑스러운"(208면) 당신. 썸머가 블루에게 했던 말을 중얼거려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같은 건 신경 쓰지 마."(288면) 당신이, 아니 우리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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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속 지느러미

─ 조예은, 한겨레


하지만 세상의 모든 노래를 단 한 사람의 목소리로만 듣길 바라는 마음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지(p. 11)



『입속 지느러미』는 선형이 갑자기 백골로 발견된 삼촌 '민영'의 건물을 상속받으면서 시작된다. 선형은 그 건물을 정리하면서 아름다우면서도 잔혹한 존재인 인어, '피니'를 만난다. 선형은 한때 작곡 동아리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경주와 사랑에 빠졌고, 밴드를 결성했으나 현실 때문에 그만둔 아픔이 있었다. 그러나 선형은 피니의 허밍에 매혹되어 경주에게 느꼈던 강렬한 마음, 즉 "세상의 모든 노래를 단 한 사람의 목소리로만 듣길 바라는 마음"(11면)을 다시 갖게 된다. 피니는 혀와 성대가 잘려 있었고, 민영의 죽음과 그의 메모에서 단서를 얻어 인육을 먹는 행위가 혀를 자라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선형은 피니에게 목소리를 돌려주기 위해 또다시 자신을 배신하려는 옛 연인 경주를 희생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걘 자살한 거야."

"자살한 사람이 어떻게 야산에서 백골로 발견돼요? 묻어준 건 누구고요? 이해가 안 가요."

"나도 이해 안 돼. 걘 원래 이해 불가한 애였어." (p. 68)


"그거 알아?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계속 계속 생각하다 보면 이해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다 상관 없어져.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이 무의미해지지. 어차피 끝내 알 수 없을 테니까. 나 아닌 존재는 결국 미지의 영역이니까. 그 지점에 이르러서야 깨닫는 거야.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을 왜 계속 생각할까?"

장 사장이 선형을 돌아보았다. 선형은 몰래 챙긴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래서 어, 나 설마 걔 좋아하나 했지. 이게 전부야." (p. 143)



선형이 피니에게 가지는 열망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갈망 같기도 했다. 사랑했던 사람의 배신, 스승의 표절 같은 상처들. 그것은 비틀어진 갈망으로 드러났고, 돌이킬 수 없는 행위로 이어졌다. 사랑은 각자의 형태가 있다. 선형과 민영처럼 광기에 가까운 사랑도 있는 반면, '장 사장'처럼 한 발자국 뒤에서 머무르는 사랑도 있다. 선형이 저지른 범죄 수습을 도와준 것은 민영의 파트너 '장 사장'이었다. 난 장 사장이 사랑을 표현한 대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불가해한 대상을 사랑하는 일. 걔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곁에 있어주는 마음. 그게 대체 "사랑이 아니면 무엇"(11면)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 선형을 도와준 것도 사랑의 연장선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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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엔 분명 자신도 경주도 다른 친구들도 모두 진심이었다. 하지만 진심은 영원하지 않으며 우리가 언제까지 20대일 수는 없다는 것*.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p. 19)


이기적이라 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상관없었다. 우리에겐 결국 각자의 바다가 있으며 심해에 무엇이 도사리는지 알 수 없으므로. (p. 149)


읽으면서 깨달은 건, 아직 내가 사람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 나는 끝까지 경주가 선형을 아직 사랑하길 바랐던 것 같다. 선형이 만든 노래를 그리워했기를, 아직도 사랑하기를. 경주가 밴드를 떠난 순간부터 이미 끝났다는 걸 직감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어쩌면, 같은 수식어를 자꾸만 붙이고 싶은 마음은 뭘까. 그 시절의 "몰입과 해방"(17면)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 유한함과의 괴리 속에서 영속적인 슬픔이 발생한다. 그 순간에는 진심이었을지도 모르나, 마음의 온도는 각자가 다르고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 이건 너무나 자명하면서도 슬픈 일이다. 그러니 피니와 선형이 영원히 만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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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말에도 여름이 계속 이어지고, 다음 주에는 비 소식이 있다고 한다. 눅눅한 습기를 머금으면 이 더위가 조금 가라앉을까. 그때까지 여름을 마음껏 읽어야지. 그 순간의 아름다움은 영원하지 않으며, 결코 돌아오지 않으니까. 우리의 사랑스러운 외로움이 일광에 녹아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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